어릴 적 꼬마 소년과 친구 J는 골목에서 축구 공을 발로 차기도 하고, 정구 공을 맨손으로 주고받기도 하면서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뛰어 놀았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둘 사이는 변함 없었습니다. 늘 방과 후까지 남아 공 두 개만 있어도 둘 중 누군가 어머님이 부르러 오실 때까지 배고픈 줄 모르고 뛰어 놀았습니다.
소년은 야구가 더 좋았지만 친구는 축구가 더 좋았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리틀 야구단에 들어갔고, 친구는 학교 축구부에 들어갔습니다. 그 뒤로 예전처럼 방과 후에 같이 뛰어노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화투패 짝패처럼 떨어질 줄 몰랐던 둘은 쉬는 시간을 아껴 흰양말이 새까매지도록 복도를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다 학교 축구부가 해체됐습니다. 친구는 축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됩니다. 소년과 친구의 첫 번째 이별이었습니다. 소년은 슬펐지만 친구가 축구를 계속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이제 일과생활을 함께 할 수 없어진 둘은 밤늦게 만나 힘든 훈련도 잊고 뛰어 놀았습니다. 둘이 함께 한 집에서 잠드는 날도 많았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친구 어머니가 하시는 미용실로 소년은 까까머리를 깎으러 갔습니다. "꼬마는 P중으로 가게 됐다며?: ?"네, 계속 야구하려고요. J는 A중 간다면서요?" "그래, 역시 계속 축구해야 하니까." "그럼 이제 합숙도 하겠네?" "네." "자주 보기 힘들어지겠다." 소년은 약간 쓸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 아니야, 우린 쌍둥이잖아." 소년이 미용실에 온 걸 알고 친구가 찾아왔던 겁니다.
둘은 그날 누가 도(道) 대회에서 먼저 우승을 하는지 내기를 합니다. "내가 유리하지, 야구팀이 더 적으니까." "웃기시네. 두고 보자." 그렇게 소년은 친구와 떨어져 합숙 생활에 익숙해져야 했지만 싫지 않았습니다. 꼭 친구보다 먼저 우승하고 싶었으니까요. 그때 소년은 벌써 170cm도 훨씬 넘는 키였습니다.
소년은 1학년 시절부터 두각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중학교 3학년과 견줘도 뒤쳐지지 않는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빠른 공, 위기에 몰려서도 주눅 들지 않는 강심장, 소년은 1학년 때부터 프로팀 스카우트가 관심을 보일 정도로 승승장구 합니다. 소년은 가끔 친구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깎고는 했지만, 다른 학교에서 합숙 중이던 친구 모습은 자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소년과 친구의 두번째 이별이었습니다.
소년이 다시 친구를 만난 건 병원이었습니다. 친구 어머니가 실수로 그만 소년 귀에 상처를 입히신 것입니다.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려오신 소년 어머니 곁에는 자기가 더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친구가 서 있었습니다. "야구 보다가 너무 좋아서 내가 날뛰어서 그랬어." 소년은 미래에 자기가 뛸 팀에서, 자기가 꼭 닮고 싶어 하는 선수가, 그것도 한국시리즈에서 노히트 노런을 올리는 걸 보고, 날뛰다 그만 가위에 귀를 다치고 말았습니다. 귀에 붕대를 감고도 소년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반가워 끝없이 재잘댔습니다. 노히트 노런이라고!!!!!
다시 소년이 친구를 만난 건 소년이 처음으로 도 대회 우승을 차지했던 2학년 때였습다. "내가 졌다"하며 친구 녀석이 과자를 한아름 사들고 찾아왔던 겁니다. 한가로운 주말 "야 내가 이겼으니까 소원 하나 들어주라." "뭔데?" "아무래도 네가 실력이 모자란 것 같으니 오늘은 이 형님이 축구를 한 수 지도해주겠다."
둘은 어릴 때처럼 둘이 같이 다녔던 국민학교 운동장에 나가 공을 찼습니다. 이제 친구는 소년이 도저히 따라할 수 없을 만큼 날렵하게 움직이고 불을 부드럽게 다루는 선수가 돼 있었습니다. 중학교에 올라가 처음 치른 체력장에서 1000m를 2분 58초에 뛰었던 꼬마였지만 조랑말처럼 끊임없이 뛰어다니는 친구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야, 너 이렇게 잘하는데 왜 우승 못했냐?" 수다를 떠느라 소년이 미처 보지 못한 돌부리에 발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공중으로 그대로 뜬 소년 몸뚱아리는 오른쪽 무릎부터 그대로 맨 흙바닥에 쳐박히고 말았습니다.
소년의 야구 인생은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한국시리즈에서 노히트 노런을 하겠다던 꿈도 그렇게 날아가 버렸습니다. 무릎이 망가진 오른 다리는 축이 되어 주지 못했고 그의 공은 위력을 잃었습니다.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해 보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유능한 타자가 못 됐습니다. 소년은 야구를 그만두었고 학교를 떠나 전학을 갔습니다.
친구는 진심으로 미안해했지만 소년은 아무렇지 않은 척 했습니다. "걱정 하지마, 괜찮아." "뭐가 괜찮아?" "사실 요즘 야구 그만둘까 생각 중이었어." "왜?" "한국시리즈에 갈 자신은 있는데 노히트 노런은 못할 것 같았거든. 알잖아, 나 100점이 아니면 0점이나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 J야 대신 약속이 있다." "뭔데?" "월드컵에서 꼭 한 골만 넣어줘라." "그럼 넌?" "난 가장 유명한 기자가 되어서 꼭 네 기사를 쓰고 싶어." 그해 가을 도 대회에서 빗속을 뚫고 거짓말 같은 오버헤드 킥으로 선취 골을 올렸지만, 친구는 결국 우승을 못한 채 중학교를 마쳤습니다.
친구는 꼬마 몫까지 열심이었습니다. 둘이 살던 도시의 축구 협회장님이 친구가 다니던 학교 팀을 이끌고 외국 원정에 나갔을 때 일입니다. 당시 국내엔 여전히 생소했던 번지 점프대가 있었습니다. "누구 뛰어볼 사람?"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을 때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하고 나서는 깡마른 녀석. 친구였습니다. 친구는 호기롭게 번지 점프대에 올랐고 그 길로 협회장님 눈에 들어 주목 받게 됩니다. 그 동안 꼬마는 부지런히 스포츠 공부를 하면서 기자가 될 준비를 합니다.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 된 꼬마는 국가대표 명단에 올라 있는 친구 이름을 확인하게 됩니다. 얼마 뒤에는 친구가 일본 프로축구(J리그)에 진출한다는 소식도 듣게 됩니다. "엄마 미용실만 가지고는 힘들어서…. 가서 돈 좀 벌어 오려고." "그래, 임마, 열심히 해라." 둘의 세번째 이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02 월드컵 축구, 친구는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립니다.
친구는 월드컵에서 소년과의 약속을 지켰을까요? 대한민국 대 포르투갈 경기을 보던 꼬마는 술집이 뒤집어 질 정도로 큰 소리를 지르며 친구 득점을 환호했습니다. 그 도시 유흥가에서 새벽까지 길거리 응원전을 주도하던 꼬마는 사람들의 환호 속에 차 지붕에서 떨어지는 퍼포먼스를 하던 중 그만 또 오른쪽 무릎을 다치고 맙니다. "괜찮아, 괜찮아, 정말 괜찮아, 아무리 다쳐도 괜찮아. 고마워, 약속 잊지 않고 지켜줘서."
이제 친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축구 팀에 당당히 스카우트 됐습니다. 소년과 꼬마가 살던 도시엔 친구 이름을 딴 거리도 생겼습니다. 그 거리 한구석에는 평발인 친구의 발 모양이 그대로 박힌 브론즈 모형도 있습니다. 꼬마는 그런 친구가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꼬마는 친구가 국내에 있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단 한번도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바쁠 게 뻔하니까요. 하지만 친구는 잊지 않고 연락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둘이 함께 다니던 국민학교 운동장 한 구석에서 밤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였습니다. 취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내 심장이 두 개라고 하는 줄 알아? 네가 넘어진 그 순간 네 심장 나한테 왔으니까. 나 니 몫까지 뛴다. 이젠 니가 약속 지킬 차례야." 소년은 눈물 어린 눈으로 친구를 바라 보며 한 마디 했습니다. "축구 한판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