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얼마 전 일이다. 사무실에 출근했더니 누군가 책상에 빨간 리본 하나를 내려 놨다. 최근 유행하는 월드컵 응원 리본이었다. 각자 응원 문구를 하나씩 적어 제출하도록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다고 했다. 다들 무슨 문장을 적어야 할지 의견을 주고받느라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나는 책상 한쪽에 리본을 치워놓고 MLB.com에 들어가 새벽 경기 결과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MLB TV로 보스턴과 양키스 경기를 몰래 시청하기 시작했다. 결국 리본을 수거해 갈 때까지도 유독 내 리본만 처음 상태 그대로였다. 그냥 '대한민국 파이팅!' 같은 문장 하나만 적어 넣어도 될 걸 어쩐지 그럴 마음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성격이 모난 탓이었을 것이다.

리본을 한참 모으던 담당자가 모니터를 보고 말을 건넨다. "왜 한 줄도 안 썼냐? 넌 오직 야구뿐이냐?" 그대로 아무 말도 안 했으면 좋았으련만 이런 말을 하고 말았다. "아뇨, 그냥 축구에 관심이 없어서요." 담당자가 돌아서며 들려오는 한마디. "역적이구만." 축구에 관심이 없는 (싫어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렇게 역적이 됐다. 하긴 온 나라가 온통 월드컵에 시끌벅적한 이 때, 혼자 야구 나부랭이나 보고 있는 나는 확실히 사회적 부적응자인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월드컵이 시작되면 나도 누구 못지않게 대~한민국!을 목이 터져라 외치며 특유의 박수를 손바닥이 뜨겁도록 쳐댈지 모른다. 16강에 진출하고, 토너먼트에서 승리가 계속된다면 나도 뜬 눈으로 밤을 지샐 확률이 높다. 경기 다음 날 아침, 새벽 경기 시청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온통 축구에 대한 얘기만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죄값은 그러게 치러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날 아침은 다만 기분 좋은 유니콘스의 연승 행진에 들떠 있었고, 막 시작된 양키스와 라이벌전에 더 관심이 갔을 뿐이다. 아직 한 달이나 남은 '미래'보다 치열하게 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재'가 더 나를 설레게 한다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일까? 사람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나 역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다만 그 현재를 집요하게 방해하는 축구라는 이름의 훼방꾼에 무관심하고 싶었을 뿐이다.

사실 멋쩍은 웃음으로 넘기긴 했지만, 담당자에게 묻고 싶었다. '왜 당신이 야구에 무관심하면  아무 상관도 없지만, 내가 축구에 무관심하면 역적이 되어야 하는가?'하고 말이다. 그냥 딱 그 순간 나는 정말 야구가 너무 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야구를 꼭 봐야만 한다고 강요할 권리가 없듯 그 누구도 내게 축구와 응원 리본을 강요할 권리는 없는 게 아닐까? 아니, 축구가 국기(國技)인 나라에서 야구팬으로 살려면 당연히 치러야 할 댓가라고 생각했어야 할 일인가?

내가 요구하고 싶었던 건 다만 '축구에 무관심 할 수 있는 자유'였다. 싫어할 수 있는 권리도 아닌 무관심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나는 축구를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게 축구를 강요하는 모든 이들은 싫어한다. 나는 축구를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게 리본을 강요하는 이 사회는 싫어한다. 나는 축구를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축구에 무관심하다고 말하면 역적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 분위기는 싫어한다.
 
정말이지, 나는 다만 야구가 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축구보다 야구가 천만 배쯤 더 좋을 뿐이다. 다시 그 시각으로 돌아간대도 내 리본엔 점 하나도 찍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탁하건대, 내게 축구에 무관심할 수 있는 자유를 좀 주면 안 되는 걸까? 적어도 월드컵 첫 경기가 열리기 전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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