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풍경 하나가 돌아왔다. 요즘 야구장에 가보면 야구를 '보러'온 게 아니라 '하러'온 것처럼 보이는 꼬마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WBC이후 야구 용품 판매가 늘었다는 보도가 이런 풍경을 유발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유소년 야구팀들은 선수가 없어 제대로 경기를 치를 수도 없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려온다. 후자가 사실 오늘날 우리 유소년 야구의 현실에 좀더 가까울 것이다.
현재 대다수의 야구팬은 어릴 적 뒷골목에서 '찜뿌'를 하며 자란 추억을 공유하는 세대다. 제대로 된 장비 없이도 정구공 하나, 각목 하나면 충분히 '김재박'이 되고 '최동원'이 됐던 그 시절, '80년대만 해도 어린이 야구 회원 점퍼는 모든 어린이의 '로망'이었다. 하지만 이제 아이들에게 야구는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낡은 스포츠로 각인된 게 사실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꼬마 친구들에게 야구가 얼마나 재미있는 '놀이'인지 알려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필자는 조용빈 님을 찾았다. 조용빈 아니 번트앤홈런이라는 ID로 더 유명한 분, 국내에 인터넷이 도입된 초기부터 야구 게시판을 찾았던 이들이라면 꽤나 익숙한 이름일 것이다. 현재 스포홀릭에도 필진으로 계신 문현부 님과 함께 꾸려가던 Buntnhr.com이라는 사이트는 국내 최고 수준의 야구 관련 사이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던 조용빈 님의 활동이 다소 뜸한 것 같아 궁금해 하던 독자들도 꽤 있으리라 본다. 조용빈 님의 근황과 함께 우리나라 유소년 야구 발전의 '또 다른 길'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황규인(이하 황) ; 최근에 귀국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조용빈(이하 조) ; 네, 야구 공부차 미국에 좀 다녀왔습니다.
황: 먼저, 야구계에 투신하게 되신 계기를 좀 말씀해 주신다면?
조: “어렸을 적부터 야구에 특별히 관심이 많았습니다.”하고 말씀드리면 너무 상투적인 답변이겠죠. 뭐 야구 좋아한 것으로 치자면야 다른 골수 야구인분들과 크게 다름이 없겠지만, 저는 특이하게도 어렸을 때부터 야구관련 행정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야구를 무척 좋아했지만 운동에 소질이 없고 공부가 아깝다는 이유로 야구부 입부가 원천봉쇄 되었던 초등학교 시절을 겪어오며 항상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진정한 학생 야구부를 만들어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구요, 점점 자라나면서 이 꿈이 ‘유소년 야구 저변확대의 중심에 서고 싶다‘는 구체적인 계획으로 바뀌어 온 것 같습니다. 선수로 성공하기엔 운동신경이 부족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야구 실력은... 립켄 야구학교에서 선수들과 어울려 코칭해도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만 야구 합니다.... (웃음)
황: 그럼 대학에서도 이와 관련된 분야를 전공하셨나요?
조: 아닙니다. 대학에서는 산업공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스포츠 경영 석사과정을 하러 4년 전에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사실, 스포츠 경영관련 공부가 목적이었다기보다는 미국의 유소년 야구 환경을 직접 경험하고 느끼기 위함이 더 큰 목적이었습니다. 비록 외형적으로 보면 산업공학을 전공하고 스포츠 경영방면, 그것도 유소년 야구를 위해 유학한다는 것이 비정상적인 행로로 보였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꿈을 이상으로 만들기 위한 과감하면서도 당연한 선택이었죠.
황: 공부에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셨는지요?
조: 네. 유소년 야구저변이라는 것이 미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스포츠 경영의 학과 과정에서 배우는 부분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현장 경험을 하면서 많이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이 분야 전공의 미국학생들은 대부분 프로팀에서 인턴생활을 하는 데 비해, 저는 특이하게 컬럼버스市(오하이오 주립대가 위치한 곳) 학교체육 협의회 소속으로 고등학교 운동부를 관리하는 인턴생활을 하였는데 이때의 경험이 제 철학이나 신념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려서, 유학생활을 거치며 단단하게 형성된 제 기본 철학은 운동선수를 만들어 내는 데에만 온 역량을 집중하는 유소년 야구프로그램이 아니라 미래의 대통령, 숙련된 근로자, 국회의원, 회사원, 장관, 과학자 등을 배출할 수 있는 저변형 클럽 팀이 유소년 야구의 근간이 되어야 야구가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야구가 유소년들에 많은 것을 베풀어야만 그들이 자라났을 때 그들로부터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죠. 프로야구를 통해 아이들이 야구를 보고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소년 체육활동의 일환으로서 야구가 홍보되어야 야구 저변 확대는 물론 야구의 위상 향상이 이루어지겠지요.
황: 코칭 경력이 좀 특이하다는 생각입니다. 공부가 목적이셨는데 야구 코칭에까지 뛰어드시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조: 이 부분은 얘기가 좀 깁니다. 특히 국내 유소년 야구가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 일색이고, 또 그러다보니 야구 지도자는 무조건 선수출신이어야만 하는 국내 실정에서는 굉장히 특이한 경력이겠죠. 이 특이해 보이는 경력을 이해하시려면 먼저 미국의 유소년 야구에 대해 좀 설명을 들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의 경우 만 14세 이하의 유소년 야구는 클럽 시스템을 바탕으로 운영되는데요, 이 클럽 야구팀의 코치들은 대부분 학부모 자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유소년야구 기본 철학이 일정 나이 이전까지는 야구의 '재미'를 주는 것이 우선이라는 식이기 때문에 이 학부모 야구 지도자들은 야구 기술의 전달자라기보다는 '야구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합니다. 개개인의 기술 향상이나 팀의 성적보다는 주로 아이들이 야구클럽 활동에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죠. 미국의 드넓은 야구저변은 상당부분 이러한 유소년 야구 지도 철학에 기인합니다.
제가 직접 코칭 쪽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운동부를 관리하는 인턴 생활을 하던 중 지역 중학 야구 클럽 팀에서 지도자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한 때문이었는데요, 미국 땅에 있는 동안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이었기에 주저 없이 지원했습니다. 제가 일하던 고교 팀의 야구 감독이 지역 클럽리그 운영진에게 저를 좋게 이야기 해주어 감독 자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황: 실제 현장에서의 지도 경험을 통해 느끼신 점이 있다면요?
조: 제가 처음 지도했던 팀 이름이 Bulls였는데요, 미국에서 경험한 일들 중 가장 값진 경험은 Bulls팀의 지도 경험이었다고 회상할 정도로 재미있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대만 고교 클럽야구(비엘리트팀) 스타플레이어 출신인 예(쭨쭈)코치를 만나게 된 것도 행운이었구요. 그 친구와 함께 훈련 프로그램을 짜면서 참 즐거웠습니다. 저희 팀이 훈련 프로그램도 좋고 분위기도 너무 좋아서 다른 팀 아이들이 저희 팀으로 오겠다고 아우성칠 정도였죠.
비록 지역 토너먼트 준결승에 오른 것이 가장 좋은 성적이었지만, 제게는 저변을 바탕으로 한 미국 유소년 야구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 자체로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마침 학위도 마무리하게 되었는데, 미국에서 좀 더 현장경험을 더 쌓아야겠다는 생각에 립켄 야구학교와 NPA(전미 피칭연합) 등에서 더 코칭 경험을 쌓았습니다.
립켄 야구학교는 칼 립켄 주니어 선수가 만든 야구학교로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시설을 자랑하며 매년 1500명 규모의 초대형 야구캠프를 운영하는 곳이구요, NPA는 마크 프라이어 선수를 배출한 유명한 피칭 스쿨입니다. 참, 립켄 야구학교는 한국 유소년 대표팀이 참가하는 립켄 월드시리즈를 개최하는 곳으로도 유명하죠. 두 곳 모두 코칭 프로그램이 굉장히 체계적이고 코칭 방법이 워낙 다양해 역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만 6세 어린이부터 16세 청소년까지 다양한 나이 대의 아이들을 경험할 수 있었던 점도 좋았구요.
지역 클럽 팀 지도자와 유소년 야구 전문 프로그램을 경험하면서 하나 재미있는 점을 느꼈는데요, 미국의 경우 유소년 코칭에 대한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손쉽게 공부할 수 있는데다가 유소년 야구 레벨에서 어른들이 요구하는 것도 상대를 이기기 위한 기술 습득이 아니라 기본기에 충실한 야구이기 때문에, 사실 유명 야구 학교의 프로 출신 코치나 동네 클럽 팀의 할아버지 감독님의 코칭 능력이나 프로그램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소년 야구 레벨의 코칭 능력은 야구 외적인 면에 의해 크게 좌우되곤 했죠. 우리의 유소년 학교체육과는 달리 강제성과 규율이 비교적 약한 그쪽 사정상 아이들을 어떻게 모티베이트(motivate) 시키느냐에 따라 코칭의 질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메이저리그 출신 코치들과도 함께 일해 보고 지역 클럽 팀에서 전문 선수 출신이 아닌 학부모 자원 코치들과도 함께 일해 보았는데요, 코칭 능력으로 기억에 남는 코치들 중 상당수가 학부모 자원코치들이었습니다.
황: 말씀만으로도 참 흥미로운 경험을 하셨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재미있는 일화는 없었는지요?
조: Bulls팀을 지도하던 때에 제로드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보통 미국 클럽 팀들이 참여 위주다보니까 어떤 팀이나 선수급 아이들이 두세 명, 완전 몸치 아이들이 두세 명씩 있게 마련인데 제로드는 완전 몸치 중에 몸치였죠. 또래들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고 1루까지 뛰는 것도 버거워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게다가 녀석은 2루수 이외의 포지션에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이유인즉슨 베이스-베이스간 거리도 제대로 송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리그 규정상 모든 선수가 7이닝 중 3이닝 이상을 뛰어야 했는데, 제로드 앞으로 공이 가거나 제로드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는 모두가 속으로는 전혀 기대를 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즌 중반에 1위를 다투던 팀과 굉장히 중요한 게임이 있었습니다. 상대팀은 에이스 투수를 내세웠구요. 키도 크고 공도 빨라서 저희 팀이 도저히 스코어를 못 내고 있었습니다. 헌데 그날 제로드가 한 건을 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느린공도 제대로 못 맞추던 제로드가 그날은 2루수 키를 넘기는 안타를 치고 일루에서 간신히 살아나갔죠. 아마 그 안타가 팀의 첫 출루이자 제로드의 시즌 첫 번째 출루였던 것 같습니다.
그 경기 이후 아이들 모두 제로드를 다시 보게 되었죠. 그 뒤로 제로드는 우리 팀의 리더가 됐습니다. 도저히 안타가 나올 수 없는 엉성한 폼으로 간간히 안타도 만들어내기 시작했죠. 심지어는 제로드의 파울조차도 다른 아이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제로드가 첫 타석에서 파울을 쳐내면 그날은 저희 타선이 폭발하는 날이었죠. 상대 투수에 관계없이 말이죠. 그래서 전 제로드를 팀의 1번 타자로 올렸습니다. 야구적으로는 멍청한 발상이었는지 몰라도 아이들은 문제의 제로드로부터 시작하는 타순을 굉장히 좋아하곤 했죠.
토너먼트 패배로 시즌이 아쉽게 끝난 후에 제로드가 찾아와서 제게 "야구 시작하고 이번시즌만큼 즐거웠던 적은 없었다. 1번 타자 아이디어는 정말 cool했다."고 얘기하더군요. 제로드의 기량으로 볼 때 아마 그 해가 제로드가 유니폼입고 야구를 하는 마지막 해였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해에 제로드는 굉장히 좋은 기억을 가지고 그라운드를 떠났을 것 같습니다.
제로드의 기억은 제 코칭 철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야구를 못해도 야구를 즐겁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유소년 야구코치의 임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요?
황: 그렇게 체득하신 코칭 철학을 국내에서는 어떤 식으로 활용하실 방안인지 궁금합니다.
조: 귀국하고 나서 KYBO(Korea Youth Baseball Organization)라는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KYBO 는 만 7세 이상 14세 이하 유소년 층을 대상으로 "생활체육으로서의 야구"를 보급하고 발전시킨다는 목표 하에 설립되었습니다. 저희 회사는 야구를 통하여 유소년들의 건전한 여가활동 및 체력증진의 장을 제공하는 데 역점을 두어 유소년들을 위한 방과 후 특기적성형(形) 야구 프로그램 및 주말 클럽 팀을 창단/운영/지원하는 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야구계에도 태권도 학원, 차범근 축구교실 같이 ‘품세’와 ‘기본기’를 재미있게 익힐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겨루기만이, 선수 양성만이 목적이 된 태권도학원이나 상급학교 진학만이 목적이 된 축구 프로그램이라면 단순한 경기력 이외에 아이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부분에 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시간 투자로 야구의 기본기를 재미있게 배우며 즐기고, 또 바쁜 학원생활로 인해 자칫 부족할 수 있는 야외활동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 저희 KYBO의 기본 방침입니다.
KYBO는 유소년으로 하여금 건강하고 균형 잡힌 심신을 함양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즐기면서 배우는 형태의 선진형 스포츠 클럽팀 모델을 적극 육성 및 지원할 예정이며,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면서도 흥미 위주로 짜여진 미국의 야구 교육 커리큘럼을 지도함으로서, 유소년들 및 학부모님들께 최대한 교육적인 스포츠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데 힘쓸 것입니다. KYBO는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나아가 국내 전 스포츠계에 바람직한 산학협력 유소년 생활체육으로서의 스포츠 프로그램 성공 모델을 제시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황: 취지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고 보십니까?
조: 사실 아직까지는 그다지 진행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막 시작이니까요. 또 미국에서 배우고 느낀 점들을 한국적 현실에 맞게 적응시키는 과정이 필요하기도 하구요. 현재는 의정부 생활체육 야구협회장님과 녹양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협조로 의정부 클럽야구팀 지도를 맡고 있는데, 이곳에서 많은 피드백(feed-back)을 얻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만들어 온 커리큘럼에도 많은 수정을 가하고 있구요. 한국과 미국 유소년들의 운동능력이나 집중력에 많은 차이가 있거든요. 의정부에서 서서히 체계가 잡히기 시작하면 근처에 또 하나의 야구 클럽 팀을 만들 예정입니다.
선진형 야구클럽이라는 개념 자체가 국내에서 워낙 생소한 개념이고, 또 생소한 만큼 주변의 관심 역시 부족하기 때문에 급하게 생각은 않고 있습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클럽 하나하나씩 늘려나갈 생각입니다. 올해 말까지 세 곳의 클럽 팀으로 45명의 회원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황: 기존의 유소년 지도 과정과 비교할 때, KYBO만의 특화된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조: 사실 미국에 유학길을 떠날 때만 해도 엘리트 스포츠 일색인 기존 야구 시스템에 굉장한 반감이 있었습니다. 뭔가가 잘못된 시스템에 대한 해답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때까지의 제 생각이었고, 저변확대와 엘리트 스포츠를 동전의 양면처럼 생각한 면이 없지 않았죠.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제 프로그램을 기존 시스템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지 않기로 말입니다. 유학 초기에 가졌던 ‘저변확대가 되려면 엘리트스포츠가 무너져야만 한다.’는 생각은 너무 단순한 흑백논리식 사고방식이었음을 인정합니다. 엘리트스포츠는 엄연히 우리가 처한 현실이고 또 쉽게 바뀔 수 없는 현실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기존의 시스템을 인정한다는 것이 새로운 시스템을 시험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아님을 밝혀드립니다. 교육계에도 대안학교가 존재하듯이, 저는 현 시스템을 인정하되 KYBO를 통해 다양한 대안모델을 제시하고 실험하고 수정하는, 일종의 대안 학교같은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스포츠계에 한 가지 모델만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없겠죠? 세계가 다원화의 시대로 가고 있는 만큼 이제 우리 야구계도 기존의 시스템을 일거에 무너뜨릴 필요 없이 조용히, 천천히라도 새로운 모델을 등장시킬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가치에 모두가 이끌려갈 필요 없이 다양한 가치가 인정되는 사회정도는 되었다고도 생각하구요.
황: 그것을 KYBO의 경영철학이라고 봐도 될까요?
A: 좀 웃기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경영철학이라고 한다면 '너무 멀리보지 말자.', '등잔 밑부터 샅샅이 살피자.'입니다.
사실 미국의 유소년 야구 환경을 생각하면서 국내 야구를 접근하면 우리 야구가 가야 할 길이 너무 멀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인프라도 구축해야 하고, 학업 부담도 줄어들어야 하고, 프로야구도 흥행되어야 하고, 경제 수준도 나아져야 하고. 이래저래 산적한 선결과제들을 생각하다보면 유소년 야구 저변 확대는 장기적인 과제로 간주되게 되고, 장기적인 과제는 '지금 안 해도 된다.'라는 식의 결론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자꾸 기존의 엘리트 시스템을 강화하는 정책들에만 역량이 집중될 뿐이죠.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장기적 과제라는 것은 지금 당장 조그만 일부터 시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업부담이 큰 현실이라면 학업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주말 체육 프로그램이나 방과 후 특기적성 교육의 형태로 야구를 접근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유소년 야구시설이 부족하면 운동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장비와 프로그램 개발에 힘써야 하는 등의 일종의 중간 과정이 필요합니다.
국민소득 3만불 시대가 된다고 해서 갑자기 리틀 야구 구장 건축이 허가되고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야구하자고 소리 지르는 일은 없으니까요. 너무 멀고 이상적인 모습만을 상상하면서 그런 날이 오려면 아직 멀었지 하고 생각한다면 부족합니다. 언제 자라나서 열매를 줄 지 몰라도 일단 지금 사과나무 씨를 심는 것이 중요하죠. 제게 장기적인 과제라는 것은 지금 당장 작게라도 시작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래서 저희 KYBO의 경영 철학은 '너무 멀리보지 말고 등잔 밑부터 살피자.'입니다.
황: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국내 교육 여건상 어쩔 수 없이 학부모들의 입김이 거셀 수밖에 없다고 보는데요.
조: 야구가 잘 되기 위해서는 학부모님들이 바뀌어야 한다, 학생들이 바뀌어야 한다. 학교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대안모델을 제시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명제들입니다. 학부모, 학교, 학생은 모두 제게 주어진 환경입니다. 엘리트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로 제 앞에 주어진 하나의 환경이죠. 이러한 환경들은 바꾸려고 하면 바뀌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탓하는 사람들은 항상 환경의 부정적인 부분에 필요 이상으로 불평을 하고 환경의 긍정적인 부분을 과소평가 합니다. 하지만 저같이 대안 모델을 제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환경을 탓하기보다는 주어진 환경의 기회를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우리 같은 학업 중심사회에서 유소년 자녀, 그것도 저출산으로 인해 외동이 또는 외동아들을 둔 학부모님들께 가장 큰 과제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리는 일일 것입니다. 학업 경쟁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일 말이죠. KYBO는 영어 야구클럽 또는 방과 후 영어야구교실 등을 추진 중에 있는데, 이는 모두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함입니다.
또, 클럽 팀의 목표 자체를 야구를 즐기는 수준, 기본기의 습득 정도로 낮추고 아이들이 최대한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야구 유사놀이를 제공해줄 수 있다면, 주당 수업시간을 5시간 안쪽으로 잡아 아이들이 일주일에 두세 번 부담 없이 나올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해준다면 야외활동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요즘 아이들의 관심을, 아니면 학부모님들의 관심을 더 많이 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주일에 3회 이내로 부담 없이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유소년 스포츠클럽들이 요즘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데요, 사실 여기 분당에만 해도 10여개 이상의 업체가 경쟁중입니다. 유소년 야구는 이미 클럽스포츠 경쟁에서 크게 뒤져있습니다. 야구라는 스포츠의 눈높이를 너무 높이 잡아왔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야구 하면 제대로 된 야구장에서 고가의 글러브 및 배트로 다른 팀을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유소년 레크리에이션용 야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데 힘쓰지 않는 한 지금의 환경에서 야구의 성공은 어렵습니다. 환경이 바뀌길 기대하는 것보다 환경을 이용해보려고 하는 것이 KYBO의 정신이니만큼 야구를 보다 아이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접근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황: 그럼 현재 상황에서 유소년 야구 인프라 구축을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요?
조: 유소년 야구 인프라 구축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야구가 유소년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인프라 구축은 장기적이고도 거시적인 일입니다. 미국의 수많은 리틀리그 야구장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들이 아니라 리틀리그 시절을 즐거웠던 기억이라 추억하고 자신들의 자식들에게도 그 기억을 전달해 주고 싶어하는 어른들이 만들어준 것입니다.
관(官) 주도의 엘리트 스포츠 일색이었던 우리 야구계는 그 시절의 습성이 너무 크게 남아있는 것인지 도무지 그런 어른들을 길러내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과거 그 시절처럼 위에서 누군가가 뭔가를 해주기만을 바라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물론 윗분들의 노력도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결국은 하위 레벨이라 할 수 있는 일선 현장에서 야구의 긍정적 가치를 계속 어필해야만 합니다.
KYBO가 생각하는 유소년 야구 저변확대는 엘리트 선수들 수의 증가가 아닙니다. 저는 유소년야구 저변확대를 현행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 하에서의 선수 인구 증가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철저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 생각합니다.
저출산 시대에 운동에 올인(All-in)하는 선수인구가 늘어나면 국가적으로 과연 얼마나 이득이 되겠습니까?진정한 야구 인프라 구축은 유소년 야구 시절을 즐겁게 회상하는 대통령, 국회의원, 국무총리, 대학총장, 공학자, 과학자, 노동자 등이 많이 배출되어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야구에도 도움 되는 일을 적극적으로 처리해 줄 때 이루어 질 것입니다.
KYBO가 중점을 두는 또 하나의 사업은 ‘야구 전도사’가 될 수 있는 야구 지도자들을 많이 양성하는 일입니다. 현재 야구 지도자 시스템은 야구전도사보다는 뛰어난 야구 기능 전수자들을 길러내는 데에만 너무 치중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저변 확대는 그와는 다른 성질의 야구 지도자를 요구합니다. 교육학적 지식과 경험이 있는 현역 선생님들이나 교육 실무 경험자들 및 야구 지도자를 꿈꾸는 건강한 청년들을 교육시켜 방과 후 야구 특기적성 교육 및 주말 클럽 팀을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가능한 많은 아이들이 야구와 친해지도록 만들어 주어야 진정한 야구 저변확대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황: 그럼 마지막으로 야구를 즐기고 싶어 하는 어린이들에게 한 말씀?
조: 야구라는 특정 스포츠를 떠나서 어린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충분한 양의 야외활동입니다. 어렸을 때 열심히 뛰어노는 아이가 커서도 건강하게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습니다. KYBO의 야구 프로그램은 학원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어린이들에게 즐거운 야외활동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 멋진 유니폼을 입고 마음껏 공 던져보고 달려보고 싶은 어린이들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황: 하시고자 하는 일이 모두 잘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조: 네, 감사합니다.
조용빈 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환경'에 대한 언급이었다. 베이스볼 보이, 베이스볼 걸이 자랄 수 있는 특별한 환경이 따로 존재하는 건 아니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도 아이들이 야구에서 '재미'를 느끼게끔 해주는 일이 중요하다. 환경을 바꾸려 하기보다 현실에서 '재미'를 찾아주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늘 '겨루기'뿐인 세상에서 재미를 찾기는 사실 쉬운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야구팬들이 어릴 적에 그토록 야구에 목말라 했던 것 역시 좋은 시설과 장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저 야구가 좋았고 야구와 닮은 '놀이'들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을 뿐이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특정한 프로그램을 통하지 않고서 그런 놀이와 재미를 접할 수 없다면 그런 프로그램을 더더욱 활성화시키는 것 역시 야구 저변 확대의 한 수단이 될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 기회를 지금의 어린이들에게 제공해 주는 것이야 말로, 그러니까 야구의 재미를 그들에게 전도해주는 것이야 말로, 이 땅의 야구팬들에게 주어진 소명이자 의무가 아닐까 하는 얼핏 거창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한 세기 전, 선각자의 외침을 반복하고 싶어졌다. 어린이들에게 야구를 허(許)하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