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과 수원 구장에서 관중들을 너무도 신나게 만드는 이벤트가 벌어졌다. 팬들에게 값비싼 사은품을 선물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두 구장에서 모두 감동적인 명승부에 짜릿한 역전 드라마가 펼쳐진 것도 아니다. 그냥 비가 왔을 뿐이다. 그래서 경기가 취소돼 팬들은 경기를 끝까지 관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재미가 반감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수원 구장은 2회초 0:0 동점 상황에서 빗줄기가 굵어지며 경기 중단이 선언됐다. 프로 야구에서 강우로 인해 경기 중단이 선언된 경우 무조건 30분을 기다린 뒤 경기 재개 여부를 판단하도록 돼 있다. 야구장을 찾은 거의 모든 팬들은 무료한 이 시간 동안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빗줄기가 약해지기는 했지만 이미 경기 진행이 어려울 만큼 그라운드는 흠뻑 젖어 있었고, 약한 빗줄기가 계속해서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결국 경기 취소가 선언됐다.
팬들이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현대의 차화준 선수가 홈 플레이트로 다가왔다. 가벼운 쉐도우 스윙 후 홈런이라도 친 것처럼 그대로 다이아몬드를 돌아 보호막이 깔린 홈 플레이트 위로 미끄러졌다. 권총을 쏘는 시늉의 세레모니도 잊지 않았다. 선수들 역시 덕아웃 밖으로 나와 차화준 선수에게 하이파이브를 건넸다. 실제 홈런을 친 것처럼 팬들에게도 인형 선물이 전달됐다. 그라운드와 관중석은 모두 웃음바다가 됐다.
잠실의 경우엔 한 술 더 떴다. 물론 5:0으로 기분 좋게 승리를 챙긴 것도 물론 영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미 한번 같은 이벤트를 해본 경험이 더 중요한 원인이었다. 이혜천이 마운드에 오르고 용덕한 역시 포수 역할을 맡았다. 타자는 임재철이었다. 임재철이 차근히 베이스를 돌아 3루를 통과하는 순간, 김민호 코치가 막아섰다. 3루로 귀루하는 척 슬라이딩, 그때 다시 김민호 코치가 손을 돌렸다. 그리고는 홈 플레이트에서 용덕한과 서로 엇갈리며 극적인 득점을 이뤄낸 것 같은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심판 역할을 맡은 나주환 또한 분위기에 합류했다. 팬들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진 건 물론이다.
불과 이틀 전만 해도 성급한 경기 취소를 비난하는 기사가 나왔다. 팬들 역시 메이저리그의 사례를 들며 이기적인 행정에 거세게 항의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 비로 경기가 끝까지 벌어지지는 못했지만, 팬들은 자신이 원했던 두 가지는 분명히 얻게 된 것 같다. 바로 '성의'와 '배려' 말이다. 오늘 KBO와 두 구단 선수들이 보여준 행동에서 분명 팬들은 자신들을 향한 성의와 배려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팬들은 참으로 해맑다. 연봉이 많은 선수가 부진하면 온갖 험한 비난을 쏟아 붓다가도 그 선수가 살아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기 바쁘다. 그건 야구장이라는 공간이 또는 야구라는 분야 자체가 팬들에게는 일탈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팬들에게 야구장은 즐기는 공간이다.
일상을 벗어나 잠시 동심으로도 돌아가 볼 수 있고, 또 스포츠가 주는 생생한 감동을 그대로 살갗으로 느낄 수 있기에 팬들은 야구장을 찾는다. 때로는 스트레스를 풀려고 왔다가 더 스트레스를 받아서 돌아가기도 하는 야구장이지만, 오늘 같은 이벤트만 있다면 팬들은 얼마든 승패를 떠나 야구장 방문 자체를 즐길 수 있다고 믿는다.
팬들은 결코 어려운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팬들은 정말 작은 배려 하나에 감동 받는다. 마치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처럼 말이다. 그것은 팬들이 이미 야구와 헤어나올래야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랑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 선수들이 보여준 깜짝 이벤트는 바로 집으로 그냥 돌아가야 하는 팬들을 위한 작은 ‘배려’였다. 그리고 비가 오리라는 예보가 있었음에도 경기를 진행하기로 한 KBO와 구단측의 결정이 바로 ‘성의’였다.
늘 말로는 팬들을 위한 행정을 표방하는 KBO, 하지만 그 말을 행동으로 느낄 수 없어서 섭섭했던 것이 팬들의 마음이다. 팬들은 물론 선수들에게 야구가 직업이라는 이유로 진지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선수들 역시 함께 즐기는 모습 속에서 팬들은 선수들을 향한 마음을 더욱 깊게 다져나갈 것이다.
프로야구의 주인은 관중이다. 스포츠 마케팅 관점으로 보자면 관중은 돈이다. 늘 관중이 준다고 푸념만 하는 종사자들에게 오늘의 이런 작은 이벤트가 하나의 시사점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돔 구장 없어도, 경기가 끝까지 진행되지 않아도, 비에 아랑곳 하지 않고 팬들은 얼마든 야구장을 찾는다는 사실 말이다. '성의'와 '배려'가 있는 한, 야구팬의 야구를 향한 사랑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