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2020 도쿄(東京) 올림픽 대륙간 간 예선 조별리그 E조 1위를 차지한 러시아 대표팀. 국제배구앤명(FIVB) 제공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는 속담은 이럴 때 쓰라고 있을 겁니다.


한국 여자 배구 대표팀은 5일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열린 도쿄(東京) 올림픽 대륙간 예선 조별리그 E조 마지막 경기에서 러시아에 2-3(25-21, 25-20, 22-25, 16-25, 11-15)로 역전패했습니다.


이번 대륙간 예선에서는 각 조 1위 팀에만 도쿄행 티켓을 줍니다. 이 경기 전까지 한국은 러시아와 똑같이 2연승을 기록했지만 이 안방 팀을 상대로 두 세트를 먼저 따고도 세 세트를 내리 내주면서 올림픽 본선 진출 기회를 놓쳤습니다.


게다가 한국은 3세트에도 22-18로 승리까지 3점 남은 상황에서 결국 경기를 내줬기 때문에 이날 패배가 더욱 아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꾸로 러시아는 아주 신이 났습니다. 바딤 판코프 러시아 감독(55)은 경기 후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행운이 따랐다. 오늘은 해피 엔딩으로 끝난 동화 같은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승리를 만끽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세르지오 부사토 코치(53·이탈리아)는 승리를 확정한 뒤 러시아 통신사 리아 노보스티 카메라를 향해 흔히 칭키 아이(chinky eye) 또는 슬랜트 아이(slant eye)라고 부르는 동작을 취했습니다. 아시아인을 비하할 때 하는 행동입니다.


러시아 여자 배구 대표팀 세르지오 부사토 코치. 칼리닌그라드=리아 노보스티


러시아 스포츠 매체 '스포르트24'는 이 사진을 소개하는 기사에 "부사토 코치가 이례적인 방법으로(необычным образом) 기쁨을 표시했다"고 썼습니다. 


학부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한 지인에게 문의한 결과 "러이아어 'необычным'는 영어 낱말 'unsual'로 바꿀 수 있다. 맥락에 따라 다르지만 낱말 자체에는 특별히 부정적인 뉘앙스는 없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열받는 게 당연한 일. '스포츠아시아'에서 처음 이 사진을 찾아 보도힌 뒤 각 언론에서 잇달아 소식을 베껴 전하면서 배구 팬 사이에 공분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대한민국배구협회는 러시아배구협회에 공문을 보내 항의하는 한편 부사토 코치에 대해 징계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구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문제는 이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나 국제축구연맹(FIFA)과 달리 국제배구연맹(FIVB)에는 이를 처벌할 만한 마땅한 규정이 없다는 것.


엄한주 FIVB 경기위원(성균관대 교수)은 "FIVB 규정(심판규칙서, 감독관 케이스북)에는 포괄적으로 상대팀 선수, 코칭 스태프, 응원단, 팬 등을 존중하라는 문구만 있을 뿐 인종 차별이나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세리머니를 금지한다는 내용은 없다"면서 "배구협회 차원에서 항의를 한다고 해도 특정 국가 이름을 명시하지 않은 채 케이스 하나로 분류해 주의 또는 권고 사항으로 정리하는 선에서 그칠 확률이 높다"고 설명했습니다.


2018 FIVB 세계여자선수권대회 본선 진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세르비아 대표팀. FIVB 홈페이지 


사실은 FIVB부터 경각심이 부족합니다. 세르비아 대표팀은 2017년 5월 29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지역예선전에서 안방 팀 폴란드를 3-0으로 물리치고 2018 FIVB 세계선수권대회 본선 진출권을 따냈습니다. 그다음 이런 포즈로 기념 사진을 찍었는데 FIVB는 무려 공식 보도자료에 저 사진을 썼습니다. 


FIVB는 항의가 이어지고 나서야 사진을 교체했습니다. 그러면서 "FIVB는 세르비아 팀 이번 행동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이 선수들이 어떤 징계를 받았다는 소식은 나온 적이 없습니다. 엄 위원이 말한 대로 FIVB에서 일처리를 한다면 아직 '케이스 하나'로 분류하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러시아에서 비슷한 일이 발생한 게 놀랄 일도 아닙니다.


유색 인종으로는 처음 백인 학교에 입학한 도로시 카운츠. 동아일보DB


그렇다고 그냥 이런 인종차별적인 인식을 받아들이자는 건 아니지만 변화에는 시간이 걸릴 겁니다. 도로시 카운츠(72)는 1956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 있는 해리하딩고교에 입학했습니다. 그 전까지 이 학교에는 백인만 다녔습니다.


카운츠는 자신을 놀리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지만 학생들은 그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즐겁다는 듯 카메라를 향해 저렇게 활짝 웃었습니다. 이런 괴롭힘이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카운츠는 결국 학교를 옮겼습니다.


그래서 어떤가요? 저 사진에서 웃고 있는 이들 얼굴을 보고 여러분도 같이 웃고 계신가요? 아니면 눈살을 찌푸리셨나요? 저 사진에 등장한 이들은 아니라고 해도 그들 후손 대부분은 사진에 있는 조상 얼굴을 보며 부끄러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리하딩고교는 2008년 카운츠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습니다.


위에서 보신 사진 두 장도 마찬가지. 머지않아 모두에게 참 부끄러운 사진이 될 겁니다. 진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9월 11일 추가


재미있게도 부사토 코치가 러시아 대표팀 사령탑에 앉게 됐습니다. 한국은 18일 러시아와 FIVB 여자 월드컵에서 맞대결을 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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