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방수현(47·사진)이 한국 배드민턴 단식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배드민턴연명(BWF)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게 됐습니다.


대한배드민턴협회는 "BWF로부터 방수현이 2019 BWF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뽑혔다는 통지문을 전달 받았다"고 28일 밝혔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선수 가운데는 2001년 박주봉(55·일본 대표팀 감독), 2002년 김문수(56·성남시청 감독), 2003년 정명희(55·화순군청 감독) 정소영(52·생활체육 지도자), 2009년 길영아(49·삼성전기 감독) 김동문(44·원광대 교수) 라경민(43·전 대표팀 코치), 2012년 하태권(44·요넥스코리아 감독) 등 복식 선수 8명이 BWF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지만 단식 선수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배드민턴협회 관계자는 "방수현은 현역 시절 수지 수산티(48·인도네시아), 예자오잉(葉釗穎·45·중국)과 삼각구도를 형성했다. 반면 복식 선수 라이벌을 찾기가 힘든 일이 많았다. 이 때문에 방수현이 상대적으로 명예의 전당 입회 기준이 되는 메이저 대회 성적에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했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방수현은 이 세 명 중에서 3인자에 가까웠습니다. 방수현은 수산티에는 5승 12패로 밀렸고, 예자오잉을 상대로도 4승 5패로 열세였습니다. 수산티와 예자오잉 사이는 11승 7패로 역시 수산티의 우위. 결국 최강은 수산티였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조국 인도네시아에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안긴 수산티


방수현은 2016년 이영미 칼럼 인터뷰에서 "내가 수산티를 처음 본 건 1987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렸던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였다. 당시 난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그 나이에 인생의 '벽'을 만난 것이다. 성적이 기억 안 날 정도로 완패했다”며 “그 후로 국제대회 나갈 때마다 수산티가 내 발목을 잡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당시엔 정말 미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이 선수는 다치지도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라면서 “난 계속 수산티를 영웅으로 만들어줬다. 수산티의 벽을 넘는다는 건 당시엔 불가능해 보였다"고 회상했습니다.


배드민턴이 처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방수현은 결승전에서 수산티와 만나 1-2(11-5, 5-11, 3-11)로 역전패했습니다.


방수현은 ”그때는 솔직히 금메달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동메달만 따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면서 “그동안 그(수산티)를 이기지 못했는데 올림픽에서 그를 이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1세트라도 그를 이긴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분위기가 변한 건 1996년 전영 오픈 준결승이었습니다. 방수현은 이 대회 준결승에서 수산티에 2-1(11-7, 5-11, 11-4) 승리를 거뒀고, 결국 예자오잉에 2-0(11-1, 11-1) 완승을 거두면서 대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방수현의 전영 오픈 우승 소식을 전한 1996년 3월 19일자 동아일보


방수현은 전영 오픈을 앞두고 남자 선수들과 훈련하면서 체력 키우기에 나섰는데 그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방수현은 “1995년 일본 오픈 결승에서 수산티에 패한 뒤로 체력 보강이 절실하다고 생각해 이런 훈련법을 택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일본에서 방수현은 수산티에 0-2(7-11, 11-12)로 패했습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오픈에서 우승했으니 주변은 물론 본인도 금메달을 기대한 게 당연한 일. 방수현은 “꼭 금메달을 따고 싶었다. 수산티로 인해 난 세계 배드민턴계에서 ‘영원한 2인자’였다. 어떻게 해서든 그 꼬리표를 떼어 낼 작정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두 선수는 이번에도 준결승에서 만났습니다. 방수현은 “그 경기를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남자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며 파워와 스피드를 키웠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대단했다. 결국 (11-9, 11-8로) 2세트를 모두 가져오면서 수산티와의 끈질긴 악연을 정리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에는 "준결승이 경기 전부터 마음에 부담을 가장 많이 준 힘든 경기였다. 그날 경기가 쉽게 풀리지 않고 체력이 많이 소비된 경기였기 때문에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힘든 고비였다"고 인터뷰했다는 것.


마음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어 열린 결승에서 방수현이 당시 '배드민턴 천재'라고 불리던 미아 아우디나(40·인도네시아)를 2-0(11-6, 11-7)으로 꺾고 금메달을 차지한 건 확실합니다. 당시 아우디나는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방수현이 애틀랜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다음날 동아일보 허엽 기자는 어머니 김정희 씨를 취재해 재미있는 멘트를 따냅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어머니는 "키는 수현이와 비슷하고 미남형은 아니지만 공부를 많이 한데다 성격도 좋아 사윗감으로 손색이 없다"고 한 남자를 소개합니다. 이 남자는 실제로 그해 10월 18일 어머니의 사위 그러니까 방수현의 남편이 됩니다.


방수현이 재미교포 신헌균 씨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단독 보도한 1996년 8월 3일자 동아일보


지인 소개로 알게 된 두 사람은 1995년 프레 올림픽(올림픽 본 대회를 앞두고 열리는 리허설격 대회) 때 처음 만났고, 이후 전화로 사랑을 키웠습니다. 사실 방수현이 금메달을 딸 때는 현재 남편뿐 아니라 시부모님도 모두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방수현은 "1995년 겨울에 오빠(남편)가 한국으로 나와 부모님께 정식으로 인사를 드렸고, 나도 그때는 마음이 많이 기울어진 상태라 올림픽 끝나면 결혼하기로 약속했다"면서 "기사가 나오기 전까지 가족들 외엔 아무도 내 결혼 소식을 알지 못했다. 올림픽 마치고 정리되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기사가 나오는 바람에 대표팀 관계자들로부터 서운하다는 얘길 정말 많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결혼과 동시에 은퇴를 선언하며 미국으로 건너갔던 방수현은 이듬해 3월 코트로 돌아오게 됩니다. 방수현은 이영미 칼럼 인터뷰에서 "내가 속해 있던 오리리화장품 팀이 해체 위기에 처했다. (중략) 그러다 대교 눈높이에서 내가 선수로 들어오는 걸 전제로 오리리화장품 선수들을 인수하겠다고 제안했다. 정말 어쩔 수 없이 코트로 돌아온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후 방수현은 1999년 6월 15일 은퇴식과 함께 코트를 떠났습니다. 2002년 트레이너 겸 선수로 복귀한다는 발표가 있었던 건 사실. 단, "기술면에서는 예전의 기량을 회복했는데 체력이 전성기 때의 40%에도 못 미친다. 앞으로 단체적에 간혹 나설 수는 있겠지만 해설과 후배 지도가 본업이 될 것"이라는 본인 인터뷰처럼 '선수'에 방점이 찍힌 코트 복귀는 아니었습니다.


이후 미국에서 주니어 대표팀을 지도했고, 2005~2009년에는 BWF 이사를 맡기도 했습니다. 방수현은 또 2004년부터 방송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합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때도 MBC에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2012년 이후 7년 만에 진행하는 BWF 명예의 전당 헌액식은 5월 23일 중국 난닝(南寧)에서 열립니다. 이달 19일부터 26일까지 난닝에서 수디르만컵이 열리는데 이 기간에 맞춰 BWF 대의원 총회가 열리기 때문에 이날 이 장소에서 헌액식을 진행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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