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1982년 오늘(6월 25일) 스페인 휴양도시 히혼에 있는 '엘 몰리논' 경기장에서는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2조 마지막 경기가 열렸습니다. 맞대결을 벌인 건 게르만족 피가 흐르는 두 나라 서독과 오스트리아.


호르스트 흐루베슈(67)가 오른발로 오스트리아 골망을 가르면서 서독이 전반 10분부터 1-0으로 앞서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웬 걸? 반격에 나서야 할 오스트리아 선수들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 소극적인 태도로 시간을 보내기에 급급했습니다. 나중에 한국 대표팀 감독이 되는 울리 슈틸리케(64)를 비롯한 서독 선수들 역시 추가 골을 노리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기가 막판으로 흐르면서 관중석 곳곳에서 '알제리, 알제리'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두 나라가 경기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고, 이 경기장을 채운 관중 4만1000명이 생뚱맞게 알제리를 연호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경기 전까지 2조 순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라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차이  승점
 오스트리아  2  2  0  0  3  0  +3  4
 알제리  3  2  0  1  5  5  0  4
 서독  2  1  0  1  5  3  +2  2
 칠레  3  1  0  3  3  8  -5  0

당시 FIFA 월드컵 때는 이기면 2점 비기면 1점을 승점으로 받았습니다. 동률일 때는 골득실부터 따졌습니다. 


요컨대 오스트리아로서는 서독에 0-3 이상으로 지지만 않으면 어차피 2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는 상태였던 것. 그러니 기본적으로 이 경기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별로 없었습니다. 


(당시 FIFA 월드컵은 24개 팀이 본선에 진출해 1~6조로 나눠 1라운드를 치른 다음 각 조 상위 2개 팀=총 12개 팀이 2라운드에 진출해 다시 A~D조로 리그전을 치르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각 조 1위가 4강 토너먼트를 진행했습니다.)


이 경기에서 꼭 이겨야 2라운드 진출이 가능했던 서독 역시 선제골을 넣은 뒤로는 급할 게 없었습니다. 어차피 전력에서 앞서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오스트리아 선수들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괜히 한 방 먹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서독은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1978년 FIFA 월드컵 때 오스트리아에게 2-3으로 패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경기에서는 결국 서독이 1-0으로 이겼고, 서독과 오스트리아가 나란히 2라운드에 진출했습니다. 알제리로서는 첫 경기에서 독일에 2-1 승리를 거두고도 결국 3전 전패를 당한 칠레와 함께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에 알제리 팬들은 돈을 꺼내 흔들면서 승부 조작이라고 항의했고(사진), 스페인 일간지 '엘 코메르시오'는 이 경기 결과를 '범죄 섹션'에 싣기도 했습니다. 이 경기 내용이 '짬짜미'라는 건 부인하기 어렵지만 돈이 오간 건 아니니 FIFA에서 어떤 조치를 내릴 수는 없는 상황. 알제리축구협회는 이 경기에 대해 공식 항의하려 했지만 FIFA는 이를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1986 멕시코 월드컵 때부터 조별리그 3차전은 두 경기를 동시에 여는 방식으로 제도를 바꿨습니다. 이번 러시아 월드컵 때도 물론 이 진행 방식을 따릅니다. 한국이 속한 F조는 27일 오후 11시(한국시간)에 한국-독일, 멕시코-스웨덴 경기를 나란히 치릅니다.


그래서 이 짬짜미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오스트리아는 2라운드 경기에서 프랑스에 0-1로 패하고 북아일랜드와 2-2로 비기면서 조 2위로 4강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2라운드 첫 경기에서 잉글랜드와 0-0으로 비긴 서독은 스페인을 2-1로 꺾고 4강에 올랐습니다. 4강에서 서독은 프랑스와 3-3으로 연장전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결국 승부차기에서 5-4로 이겨 결승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결승전에서 이탈리아에 1-3으로 패하면서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 대회 이후 알제리가 서독과 FIFA 월드컵에서 만난 적은 없습니다. 대신 2014년 대회 16강에서 사실상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과 맞대결을 치렀습니다. 1982년 월드컵 때 서독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었던 라흐다르 벨루미(60)는 드디어 복수할 기회가 왔다고 후배들을 독려했지만 알제리는 연장 끝에 1-2로 독일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16강에서 알제리를 꺾은 독일은 결국 대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멕시코와 스웨덴이 비기기 경기를 벌일 경우 독일은 한국전 경기 결과에 관계없이 무조건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과연 두 팀은 어떤 선택을 내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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