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누가 승자가 될 것이다)이 우리가 전혀 예측하지 않았던 것(골리앗에게는 약점이 있었고, 그 조그만 다윗이 전에 보지 못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으로 판명이 났을 때는 속이 상한다. 다윗 쪽이건 골리앗 쪽이건 간에 속이 상해 흥분한 사람이라면, 스포츠의 바로 그 심장부 가까이에 있는 무언가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네 시즌 연속으로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다윗이 네 시즌 연속으로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그래서 문제일까요?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면 한국배구연맹(KOVO)에서 고민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프로배구 (남자부) 포스트시즌 이야기입니다;
2017~2018 도드람 V리그 남자부 통합 우승을 노리던 정규리그 챔피언 현대캐피탈(사진)은 30일 막을 내린 챔피언결정전(챔프전)에서 대한항공에 1승 3패로 밀렸습니다. 이로써 대한항공은 지난 시즌 정규리그에서 우승하고도 챔프전에서 현대캐피탈에 패했던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습니다.
반면 현대캐피탈은 2015~2016 시즌에 그랬던 것처럼 또 한번 정규리그에서 우승을 하고도 챔프전 패배로 시즌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이에 앞서 2014~2015 시즌 챔프전 승리 팀 역시 정규리그 챔피언 삼성화재가 아니라 OK저축은행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살펴봐도 V리그 14 시즌을 치르는 동안 정규리그 챔피언이 챔프전에서 승리한 건 6번(42.9%)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다섯 번이 (설마 다른 팀이겠습니까…) 삼성화재였습니다.
▌V리그 남자부 역대 우승팀
시즌 | 정규리그 챔피언 | 챔프전 승리팀 |
2005 | 현대캐피탈 | 삼성화재 |
2005~2006 | 현대캐피탈 | 현대캐피탈 |
2006~2007 | 삼성화재 | 현대캐피탈 |
2007~2008 | 삼성화재 | 삼성화재 |
2008~2009 | 현대캐피탈 | 삼성화재 |
2009~2010 | 삼성화재 | 삼성화재 |
2010~2011 | 대한항공 | 삼성화재 |
2011~2012 | 삼성화재 | 삼성화재 |
2012~2013 | 삼성화재 | 삼성화재 |
2013~2014 | 삼성화재 | 삼성화재 |
2014~2015 | 삼성화재 | OK저축은행 |
2015~2016 | 현대캐피탈 | OK저축은행 |
2016~2017 | 대한항공 | 현대캐피탈 |
2017~2018 | 현대캐피탈 | 대한항공 |
거꾸로 올 시즌 여자부에서는 정규리그 챔피언 한국도로공사가 챔프전도 승리로 마감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여자부 쪽 역시 네 시즌 연속으로 정규리그 챔프언과 챔프전 승리팀이 달랐습니다. 여자부 역시 14시즌 동안 정규리그 우승 팀이 챔프전도 승리로 마감한 건 남자부하고 똑같이 6번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V리그 여자부 역대 우승팀
시즌 | 정규리그 챔피언 | 챔프전 승리팀 |
2005 | 한국도로공사 | KT&G(현 KGC인삼공사) |
2005~2006 | 흥국생명 | 흥국생명 |
2006~2007 | 흥국생명 | 흥국생명 |
2007~2008 | 흥국생명 | GS칼텍스 |
2008~2009 | GS칼텍스 | 흥국생명 |
2009~2010 | 현대건설 | KT&G |
2010~2011 | 현대건설 | 현대건설 |
2011~2012 | KGC인삼공사 | KGC인삼공사 |
2012~2013 | IBK기업은행 | IBK기업은행 |
2013~2014 | IBK기업은행 | GS칼텍스 |
2014~2015 | 한국도로공사 | IBK기업은행 |
2015~2016 | IBK기업은행 | 현대건설 |
2016~2017 | 흥국생명 | IBK기업은행 |
2017~2018 | 한국도로공사 | 한국도로공사 |
이런 결과를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KOVO에서 '계단식' 포스트시즌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단식 포스트시즌은 어린 시절 다들 해보셨을 '왕자와 거지' 게임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프로배구에서는 2-3위가 먼저 플레이오프에서 붙고 그 중 이긴 팀이 챔프전에 진출합니다. 남자부에서는 정규리그 3위 팀과 4위 팀이 승점 3점 이내로 끝날 때는 준플레이오프도 열립니다.
이렇게 계단식으로 포스트시즌을 치르는 건 그래야 정규리그 챔피언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포스트시즌(post-season)'이라는 표현 그 자체가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포스트시즌은 원래 시즌이 끝나고 열리는 '보너스 게임'입니다. 이 게임을 정규리그 챔피언 '대관식'으로 만들어주는 시스템이 바로 계단식 포스트시즌입니다.
2017년 프로야구 정규리그 챔피언이자 한국시리즈 승리 팀 KIA
그리고 프로야구는 이 대관식에도 사람들이 열광한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계단식으로 포스트시즌을 치른 27년 중에서 한국시리즈 승리팀 정규리그 챔피언이 아니었던 건 △1989년 해태 △1992년 롯데 △2001년 두산 △2015년 두산 등 네 번(14.8%)뿐이었습니다. 2015년에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의 모든 것'이라고 작은 제목이 달린 기사를 쓰면서 '가을야구는 달콤한 사기극'이라고 쓴 이유입니다.
가장 최근 업셋(upset) 사례였던 2015년 두산은 '이빨 빠진 사자'를 만난 행운이 컸습니다. 당시 정규리그 챔피언 삼성 소속 주축 투수 3명이 해외 원정 도박 혐의로 한국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했거든요. 만약 이때도 삼성이 우승했다면 지난해(2017년)까지 16년 연속으로 정규리그 챔피언이 한국시리즈 정상에도 등극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가을야구 인기가 떨어졌나요? 가을이 되어도 '어차피 페넌트레이스(정규리그) 우승팀이 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할 걸 뭐하러 보냐'며 팬들이 가을야구를 외면하고 있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 아무리 역사가 그렇게 증명한다고 해도 올해 우리 팀은 다르다'는 믿음이 가을야구를 지배합니다. 그 희망 하나로 실제로는 정규리그 챔피언의 대관식인 가을야구에 사람들 심장이 쿵쾅쿵쾅 뜁니다.
하지만 별수 없다. 언더독을 응원하는 팬들은 해마다 가을이 되면 '역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 역전 우승을 했다는 건 올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속임수에 빠지고 싶은 건 오히려 언더독이다. "올해 우리는 다르다. 확실히 다르다. 너희들과 달리 우리는 챔피언이 될 것이다." ─ [토요스케치]왕자와 거지 싸움? 반전을 꿈꾸는 가을야구
프로야구가 이렇게 1위 팀에 유리한 건 한국시리즈가 열리기 전 △와일드카드 결정전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세 단계가 열리기 때문. 단계별 성적을 보면 이 계단식 포스트시즌 제도가 목표를 잘 이뤄내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단 아직 세 번밖에 열리지 않은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는 일단 모두 페넌트레이스 4위 팀이 5위 팀에 앞섰습니다. 준플레이오프에서는 4위 팀이 3위 팀에 15승 12패로 오히려 앞섰습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17승 17패로 균형을 맞추고, 한국시리즈가 되면 24승 4패로 페넌트레이스 우승팀이 확실히 우위를 가져갑니다.
한국에서 이 포스트시즌 시스템을 수입해 간 일본 프로야구는 어떨까요? 일본야구기구(NPB)에서 '클라이맥스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계단식 이 제도를 도입한 건 2007년. 그 후 지난해까지 11년 동안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양대 리그에 걸쳐 클라이맥스 스테이지가 총 44번(11년×2리그×2스테이지) 열렸습니다.
리그별로 정규리그 2위 팀과 3위 팀과 맞붙는 퍼스트 스테이지에서는 총 22번 중 13번(59.1%)이 3위 팀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정규리그 챔피언과 퍼스트 스테이지 승리 팀이 맞붙는 파이널 스테이지 결과는 18승 4패(승률 .818)로 정규리그 챔피언 승리입니다. 계단식 포스트시즌 시스템에서는 단계를 거치면 거칠수록 상위 팀이 유리해진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 쪽 기록이 또 의미가 있는 건 일본은 스테이지 모든 경기가 정규리그 상위 팀 안방 구장에서만 열리고, 상위 팀에 1승을 먼저 주고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역시 계단식 포스트시즌 시스템은 정규리그 상위 팀이 이기는 걸 '정상'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상위 팀에게 유리한 구조를 만들어도 업셋은 일어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일본시리즈에 진출하고 싶으면 일단 페넌트레이스 1위를 차지하는 게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V리그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지금처럼 챔프전 승리를 더 쳐주는 분위기에서는 오히려 정규리그 때 1위를 하지 않는 게 더 낫습니다. 1위로 챔프전에 먼저 진출해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 플레이오프를 치르면서 경기 감각을 유지하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는 게 밝혀졌으니까요.
계속 이런 분위기라면 굳이 정규리그 36경기(이번 시즌 기준)를 치르면서 힘을 뺄 필요가 없습니다. 제도가 오히려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 발목을 붙잡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 정규리그 1위 팀에 유리하게끔 포스트시즌 제도를 손질하는 게 아주 이상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단계를 늘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자부는 6개 팀밖에 없기 때문에 포스트시즌 진출 팀을 더 늘리는 건 모양새가 좀 빠집니다. 같은 이유로 1-4위, 2-3위가 1라운드에서 먼저 붙고 승리 팀끼리 챔프전을 진행하는 4강 토너먼트 방식 당장 도입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제안하고 싶은 건 모든 포스트시즌 경기를 상위 팀 구장에서 하는 것. 배구에도 홈 어드밴티지가 있습니다. 그러니 플레이오프는 모두 2위 팀 안방, 챔프전은 모두 정규리그 챔피언 팀 안방에서 열면 상위팀에 유리한 시스템이 됩니다.
정규리그 챔피언이 챔프전 14번 중에 6번 승리했다는 건 사실 승률 .429보다 더 나쁜 결과입니다. 정규리그 챔피언은 챔프전 파트너보다 더 강한 팀이었는데도 이 정도 승률에 그쳤다는 건 제도에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니까요. 이 정도면 판을 크게 뒤흔들지 않고도 지금보다는 1위 팀에 유리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