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마라톤 코스 마음대로 못 짜는 이유

처음 이 생각을 한 건 2008년 3월 16일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수습기자 신분으로 2008 서울국제마라톤 겸 제79회 동아마라톤(사진)을 취재하려고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새벽을 맞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아마라톤 참가 선수들은 광화문에서 출발해 잠실종합운동장을 향해 뜁니다. 당시에 서울 도심을 뛰는 마라톤 대회는 동아마라톤뿐이었습니다.


그날 생각했던 건 이듬해 광화문광장이 들어서는데 코스를 거꾸로 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것. 


저도 그날 광화문에서 출발해 잠실종합운동장까지 (교통 수단을 이용해) 이동했는데 역시 운동장에는 별 게 없었습니다. 차라리 광화문으로 들어오면 교통통제 때문에 짜증났을 주변 상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겁니다.


다시 이 아이디어를 떠올린 건 스포츠부 발령을 받은 2013년이었습니다. 이 아이디어를 육상 담당 선배 기자에게 전하자 "그러면 오르막길을 뛰어야 해서 곤란하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실제 해발고도를 따져 보면 광화문은 30.3m고 잠실종합운동장은 13.7m입니다. 선수들이 전체적으로 내리막길을 뛰는 셈입니다.


내리막길을 뛸 때 당연히 기록이 더 좋습니다. 뒤에서 보실 것처럼 그래서 대부분 마라톤 코스가 전체적으로 내리막으로 돼 있습니다.



또 동아마라톤 주최 측 관점에서도 기록은 중요합니다. 그래야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골드라벨 마라톤 대회' 자격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동아마라톤은 국내에 하나뿐인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골드라벨 마라톤 대회입니다. 골드라벨을 받으려면 14가지 항목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역시 제일 중요한 건 경주 기록입니다.


사실 평가 점수 비중 자체는 방송중계 점수가 더 높기는 하지만 기록이 좋은 선수가 많이 나올수록 전파도 더 많이 타는 법이니까요. (참고로 올해 동아마라톤은 140여 개 나라에서 중계 합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내리막길로 코스를 짤 수는 없습니다


IAAF 규정은 마라톤은 출발점과 도착점 사이 해발고도 차이가 42m(코스 길이 0.1%)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동아마라톤은 16.6m 차이로 이 기준을 충족하고 있습니다. 비율로 바꾸면 약 0.04%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모든 길을 내리막으로 만드는 나이키 운동화


마라톤 내리막길 이야기를 꺼낸 건 나이키 운동화 때문입니다.


지난해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차례대로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딴 엘리우드 킵초게(33·케냐·사진 맨 앞 왼쪽 두 번째), 페이사 릴레사(27·에티오피아), 갈렌 루프(31·미국) 모두 나이키에서 만든 '더 줌 페이퍼플라이 엘리트(The Zoom Vaporfly Elite·오른쪽 사진)'를 신고 뛰었습니다. 


현재 마라톤 세계 최고 기록은 데니스 키메토(33·케냐)가 2014년 베를린 마라톤에서 세운 2시간2분57초. 나이키는 이 기록을 2시간 이내로 줄이겠다며 새로운 신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나이키는 더 줌 베이퍼플라이 엘리트를 '콘셉트 카'라고 소개합니다. 브레이킹 2 프로젝트를 구체화하려고 만든 첫 번째 제품이라는 뜻이지요.


그저 신발만 새로 개발하는 게 아니라 생체역학, 생리학 심리학 전문가 20명으로 된 '브레이킹 2' 프로젝트 전담팀도 꾸렸습니다.


문제는 이 콘셉트 카를 IAAF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IAAF 규정에는 "선수에게 불공정한 이점(unfair advanatage)을 줄 수 있는 기술을 포함한 신발은 만들 수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IAAF는 이 나이키 운동화가 선수들에게 불공정한 이점을 주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IAAF 규정 어디에도 신발을 어떤 재질이나 규격으로 만들면 안 된다는 내용이 없다는 점입니다. IAAF는 2주 안에 이 운동화가 규칙에 적합한지 결론을 내놓겠다는 방침입니다.


더 줌 베이퍼플라이 엘리트는 무게가 6.5온스(약 184g)로 아주 가벼운 편은 아닙니다. 마라톤화는 150g도 나가지 않는 제품도 여럿입니다.


이 신발이 무게가 나가는 건 컴퓨터단층(CT) 촬영 사진에서 확인하실 수 있는 것처럼 신발 가운데 탄소섬유판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키에서는 "탄소섬유판이 착지 후 내딛는 힘을 13% 정도 높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뉴욕타임스에서 인터뷰한 스포츠 과학자 로스 터커 박사는 "이 신발을 신고 뛰는 선수는 1~1.5% 내리막길을 계속 뛰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누리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이 맞다면 이 신발을 신고 뛰는 것만으로 IAAF 기준을 10~15배 어기는 셈이 됩니다.


나이키 마라톤화 결국 벗어야 할까?


다시 동아마라톤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1931년 시작한 이 대회는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 된 마라톤 대회입니다.


이보다 앞서 대회를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건 올해 121회를 맞은 보스턴마라톤밖에 없습니다.


보스턴마라톤은 역사가 오래 됐을 뿐만 아니라 도쿄 런던 베를린 시카고 뉴욕마라톤과 함께 '6대 메이저 마라톤 대회'로 손꼽힐 만큼 명성도 뛰어납니다.


제프리 무타이(36·케냐·사진)는 2011년 이 대회에서 2시간3분2초로 남자부 우승을 차했습니다.


당시까지 마라톤 풀코스를 이보다 빨리 달린 선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했으니 주목도 크게 받은 게 당연한 일. 


그런데 이 기록은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도 비공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내리막길 규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대회 코스는 출발점이 해발 149.4m, 도착점이 3.0m로 146.4m 차이가 납니다. IAAF 기준을 3.5배 가까이 넘긴 셈입니다(오른쪽 그래픽 참조). 


나이키 운동화는 이것보다 3배 정도 더 규정과 어긋납니다.


그러니 무타이가 억울하지 않도록 마라톤 선수들이 이 운동화를 신고 뛰는 걸 금지해야 할까요? 아니면 IAAF 규정에 재질이나 규격을 특정한 게 없으니 그대로 신고 뛰어도 무방하다고 해야 하는 걸까요?


여태 마라톤 기록 단축에는 기술 발전이 큰 구실을 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 그래도 국제수영연맹(FINA)에서 전신 수영복을 금지했던 걸 생각해 보면 IAAF에서 이 운동화를 금지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역시 스포츠에서 무엇이 반칙이고 무엇이 아닌지 따지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 더: 마라콘 코스가 구불구불한 이유

IAAF 규정에 따르면 마라톤 코스는 또 출발점과 도착점이 직선 거리로 21㎞ 이내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이 규정을 지키려면 주최 측에서는 코스를 구불구불하게 짜는 수밖에 없습니다. 선수들이 소위 '순환코스'를 뛰도록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동아마라톤 코스도 그렇게 돼 있습니다. 


이건 바람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목적입니다.


뒤에서 바람이 불면 선수에게 유리하고 앞에서 불면 반대인 게 당연한 일. 그래서 코스 방향을 바꾸는 방식으로 이 영향을 최소화하려고 한 겁니다.



보스턴마라톤 코스는 위 사진으로 확인하실 수 있는 것처럼 이 기준으로도 불합격입니다. 게다가 무타이가 뛸 때는 뒤에서 초속 6~8로 뒷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렇게 마라톤 세계 최고 기록은 바람과 함께 내리막길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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