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보스턴 팬들이 가장 원하지 않던 방식으로 '빅 파피' 데이비드 오티스(41·사진)와 이별하게 됐습니다. 보스턴은 10일(이하 현지 시간) 안방 펜웨이파크에서 열린 아메리칸리그 디비전시리즈 3차전에서 클리블랜드에 3-4로 패했습니다.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1, 2차전에서도 모두 패했기 때문에 보스턴은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올 시즌을 끝내게 됐고, 오티스의 선수 생활도 막을 내리게 됐습니다.
오티스는 이날 2-4로 뒤진 8회 볼넷을 얻어 출루한 뒤 대주자 마르코 에르난데스(24)에게 라인업 자리를 내줬습니다. 보스턴 팬들은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오티스에게 기립박수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끝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을까요. 오티스는 커튼콜을 생략한 채 동료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만 나눴습니다.
경기가 끝나자 보스턴 팬들은 "땡큐, 파피"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더그아웃에서 걸어 나온 오티스는 천천히 마운드 쪽으로 걸어가 모자를 벗어 팬들에게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면서 더그아웃으로 들어갔습니다. 오티스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썼지만 마지막 순간에 더는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오티스는 2003년부터 보스턴에서 14년을 뛰면서 1953경기에 출전해 타율 .286, 541홈런, 1768타점을 기록했습니다. 2004년 보스턴이 '밤비노의 저주'를 무너뜨릴 때 선봉장 노릇을 했고, 2007년과 2013년에도 보스턴에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안겼습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포스트시즌에서 끝내기 안타를 3개 때린 선수는 오티스가 유일합니다.
오티스는 보스턴 지역 사회에서도 구심점 노릇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2013년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때 오티스가 펜웨이파크에서 마이크를 잡지 않았다면 보스턴 시민들이 아픔을 추스르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을지 모릅니다. 오티스는 이해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688, 2홈런, 6타점으로 또 한 번 보스턴 시민들 가슴에 남은 상처를 보듬었습니다.
오티스는 '약쟁이'인가?
이렇게 훌륭한 선수지만 도핑(약물을 서서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행위) 논란이 늘 그를 따라다닙니다. 과연 오티스는 '약쟁이'일까요? 정답은 '모른다'에 가깝습니다. 네, 정말 그렇습니다.
오티스가 금지 약물을 복용했다는 근거로 가장 자주 쓰는 건 뉴욕타임스(NYT)에서 입수해 2009년 7월 30일 공개한 2003년 양성 반응자 리스트입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선수노조는 이듬해부터 약물 검사를 시행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려고 2003년 스프링캠프에서 비공개 예비 테스트를 진행했습니다. 만약 5% 이상이 양성 반응을 보이면 2004년부터 약물 검사를 도입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오티스는 당시 NYT 보도에 대해 "나는 절대 (애너볼릭)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거나 사들인 적이 없다. 처방전 없이(over the counter) 단백질 보충제를 사서 먹은 적은 있다. 그때 (어떤 성분이 들어 있는지) 꼼꼼하게 따져보지 못했던 게 잘못이었다"면서 "내가 보충제를 구입한 것 때문에 누군가 감정이 상할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감정을 상한 이가 있다면 사과하겠다"고 해명했습니다.
사무국과 선수 노조도 NYT 보도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마이클 위너 노조 법률 자문위원은 "사무국과 노조에서 양성 반응자로 결론 내린 건 96명이다. 하지만 NYT 리스트에는 108명이 들어 있다.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고 반드시 양성 반응을 보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면서 "(2007년 세상에 나온) 미첼 보고서에 나온 것처럼 이 96명 중 일부도 논란이 있는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미첼 보고서는 원래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스테로이드와 기타 경기력 향상 물질을 불법 사용하고 있는 실태에 관해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에게 보내는 독립 조사 보고서(Report to the Commissioner of Baseball of an Independent Investigation into the Illegal Use of Steroids and Other Performance Enhancing Substances by Players in Major League Baseball)"가 정식 명칭인데 전 미국 상원의원 조지 J 미첼이 작성해 흔히 이렇게 부릅니다. (원문 PDF 다운로드)
이 보고서에는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가 등장합니다. 2003년 검사 결과에서 양성 반응을 보인 선수는 2004년 노조를 통해 이 사실을 전달받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티스는 지난해 '플레이어즈 트리뷴'에 기고한 '더 더트(The dirt)'에 "(2009년 보도가 나올 때까지) 누구도 내가 약물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며 "오늘날까지도 어떤 약물이 문제가 됐는지 말해준 사람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커미셔너 지원 사격으로 판세 역전?
둘 중 하나입니다. 오티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NYT 리스트에 이름이 올랐지만 사무국과 노조에서는 아니라고 했던 8명 중 한 명이거나. 당초 가능성이 높은 건 전자(거짓말을 한) 쪽이었습니다. 오티스가 결백을 주장하면 할수록 반대쪽 근거도 쏟아졌습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41)처럼 오티스도 거짓말쟁이라고 믿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롭 만프레이드 커미셔너가 이달 2일 재미있는 발언을 했습니다. 만프레드 커미셔너는 이날 펜웨이파크에서 "롭 만프레드라는 이름이 (2003년 양성 반응자) 리스트에 들어 있더라도, 그는 자기가 금지 약물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아주 적법하게(legitimate) 소명할 수 있는 10명 또는 15명 중 한 명이었을 개연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에는 합법적인 물질과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물질, 반(反)도핑 프로그램에 따라 금지하게 되는 물질을 구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어 "(반도핑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선수에게 소명 기회를 주고 검증을 거쳐 정말 금지 약물 복용자인지 아닌지 가려낼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리에게 필요했던 건 이듬해부터 약물 검사를 시작할 수 있는 표본 개수뿐이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는 "확인되지 않은 양성 반응(not confirmed positive test results)"이라는 표현도 썼습니다.
만프레드 커미셔너가 이렇게 말했다고 그가 100% 진심을 이야기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날은 보스턴이 정규시즌 마지막 안방 경기를 치르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티스가 생애 마지막 페넌트레이스 안방 경기를 치르는 날이었죠. 만프레드 커미셔너가 정치적인 수사(修辭)를 사용하기 딱 좋은 날이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오티스가 거짓말을 한다고 믿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애너볼릭 스테로이드는 몰라도 금지 약물이지만 따로 처벌이 따르지는 않는 암페타민 같은 물질을 복용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도 많습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는 적어도 그가 2003년까지는 어떤 형태로든 약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라고 의심합니다. 저에게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자격 심사 투표권이 있대도 이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그에게 표를 던질 자신이 없습니다. 이렇게 '스테로이드 시대'가 저물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