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일본 역사상 첫 번째 프로야구 팀 니혼운도교카이 멤버 선수들.


사상 첫 번째 일본 프로야구 경기가 열린 곳은 서울이었습니다. 정말입니다. 날짜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으로부터 꼭 93년 전인 1923년 6월 21일이었습니다. 당시 경성부 용산에 있던 만철(滿鐵·남만주철도주식회사) 운동장에서 사상 처음으로 일본 프로야구 두 팀이 맞붙었습니다. 어떤 영문이었을까요? 


경성 스캔들

당시 일본 최고 인기 스포츠는 대학 야구였습니다. 이 대회가 나중에 '도쿄 6대학 야구 리그'가 됩니다. 이 리그 인기를 발판삼아 1920년 니혼운도교카이(日本運動協会·일본운동협회)라는 팀이 문을 엽니다. 이어 이듬해 2월 여자 마술사로 인기를 끌던 쇼교쿠사이 덴카쓰(松旭齊天勝)가 하네다(羽田) 구장을 안방으로 삼아 덴카쓰(天勝) 야구단을 만듭니다.


여기서 두 구단이 재미있는 선택을 합니다. 제대로 리그 조직을 갖추기 전까지는 중국, 만주, 대만 같은 곳을 돌면서 따로 따로 순회 경기를 열기로 한 겁니다. 둘이 맞대결을 하는 것보다 그 쪽이 더 흥행이 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팀은 각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야구 팀과 경기를 치르는 '도장 깨기'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두 팀이 나란히 서울에 입성하면서 맞대결이 성사됐습니다.


1차전에서는 텐카쓰 야구단이 6-5 승리를 거뒀고, 사흘 뒤 같은 곳에서 치른 2차전에서는 니혼운도교카이가 3-1로 이겼습니다. 이후 두 팀은 "일본으로 돌아가서 3차전을 치르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결국 그달 30일 도쿄 시바우라(芝浦) 구장에서 원년 챔피언 결정전 최종전이 열렸습니다. 이 경기에서는 안방 팀 니혼운도교카이가 5-1로 승리했습니다.


문제는 지진이었습니다. 그해 9월 1일 '간토(關東) 대지진(규모 7.9)'이 발생하면서 두 팀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이듬해 니혼운도교카이는 지진 피해가 없던 간사이(關西) 지방에서 다카라즈카운도교카이(寶塚運動協會)로 새로 문을 열었지만 상대 팀이 없어 또 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뒤 1934년 메이저리그 올스타팀과 맞대결하려고 모인 선수들이 경기가 끝난 뒤 '대일본 도쿄 야구 클럽'을 결성하기 전까지 일본에는 프로야구 팀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 클럽이 현재 요미우리(讀賣) 모체가 됩니다. 이 팀이 생기고 나서도 2년이 지나서야 지금 우리가 아는 일본 프로야구가 출범했습니다.


메이저리거가 찾고 애국가 작곡자도 뛴 조선 야구

일본 팀끼리 경기라 그랬는지 당시 경기 소식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전미야구단의 방한을 환영한다는 1922년 12월 8일자 1면 머리기사가 나왔습니다. (어인 일인지 이 경기를 다룬 기사도 동아일보DB에서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미국 팀은 일본을 찾은 길에 대한해협까지 건넜습니다.


1999년에 대한야구협회와 한국야구위원회에서 펴낸 책 '한국야구사'는 이 전미야구단을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이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사실 메이저리거는 3명뿐이고 마이너리그 AAA 선수가 추축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참가한 메이저리거 중 허브 페나크(1948년), 웨이트 호이트(1969년), 조지 켈리(1973년)가 나중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괄호 안이 헌액 연도)될 선수였으니 이런 평가가 아주 허튼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이 경기에서는 한국 대표라 할 수 있는 전조선군이 3-23으로 패했습니다.


재미있는 소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해 10월 18일자에 실린 제3회 전조선야구대회 결승전 기사를 보면 평양 숭실군 라인업에 안익태 선생(1906~1965)이 6번 타자 겸 2루수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사진). 안 선생은 이날 3타수 무안타(1삼진)에 그쳤고 팀도 배재군에 1-5로 패했습니다.


한때 제가 페이스북에 열심히 올리던 '옛날 신문을 읽읍시다' 시리즈를 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식민지 조선은 생각보다 스펙트럼이 다양한 공간이었는지 모릅니다. 모두가 '대한독립만세'만 불렀을 것 같지만 그 속에서도 삶은 이어져야 했던 것. 그때도 누군가는 박찬욱 감독 영화 '아가씨'에 등장하는 것처럼 동성애자로 숨죽여 지냈어야 했을 거고, 누군가는 최선을 다해 공을 던지고 방망이를 휘둘렀을 겁니다. 


대한민국이 야구 공화국이 된 밑바탕에는 극일(克日) 콤플렉스가 깔려 있다는 걸 절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일제강점기라는 이 안타까운 시간이 없었다면 우리는 야구를 이만큼 사랑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야구조차 때로는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하고 묻습니다.



댓글, 0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