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KBO

Hasta la vista, Jose!


왜 롯데를 응원하세요? 그 팀 만날 꼴찌만 하잖아요.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롯데는 2001 시즌부터 2004 시즌까지 4 시즌 연속 최하위를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5할 승률을 넘긴 것 역시 7년 전인 2000 시즌의 일이다. 그나마 시즌 승률은 .504(65승 4무 64패), 승보다 패가 겨우 하나 적었을 뿐이다.

그러나 롯데 팬들은 당당하게 말한다. 못할 때일수록 힘을 북돋아주기 위해 필요한 게 응원 아니냐고 말이다. 잘하는 팀보다 못하는 팀을 향한 응원이 훨씬 가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 하지만 롯데 팬들의 속마음은 이와 다르다.

전날 경기서 롯데가 승리하면 당장 다음날 5,000명 정도 늘어난 관중이 사직 구장을 찾는다. 롯데 팬들 역시 다른 팀 팬과 마찬가지로 승리를 갈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모든 팬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이다.

그래서 롯데 자이언츠야 말로 팬들에게 가장 큰 아픔을 주는 야구팀이다. 너무 긴 세월이라 이제 체념해 버린 걸까? 롯데 팬들은 말한다. "신은 부산에 최고의 야구팬을 주시고, 동시에 최악의 야구팀을 주셨다."고 말이다.


그러나 롯데 팬 그 누구도 롯데를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 아니, 수없이 롯데를 마음속에서 비우고 또 비워도 어느새 마음은 '롯데'라는 두 글자로 가득 채워졌다. 롯데 팬들에게 '부산 갈매기'는 신성한 범패(梵唄)가 되었고, 그들 스스로 그 누구보다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야구 때문에 성불(成佛)했다는 롯데 팬이 한 둘이 아니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의 출현, 도밍고 펠릭스 호세

그 때 호세가 돌아왔다.

'호세가 돌아왔다.' 이 짧은 한 문장에 롯데 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꼭 롯데가 한국 시리즈에서 우승이라도 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전년도 성적은 5위, 호세는 롯데를 '가을 야구'로 인도할 미륵보살이었다.

사실 해마다 겨울이면, 롯데 팬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언제나 그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롯데 팬들에게 '펠릭스 호세'가 주는 울림은 '나무관세음보살'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영원한 안식과 평화, 그리고 귀의와 구원.

이미 호세는 팬들이 가장 원할 때 원하는 것을 이뤄주는 선수였다. 그 유명한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은 호세가 없었다면 결코 이뤄낼 수 없는 일. 그리고 2001년 호세의 출루율은 .503이나 됐다. 타석에 들어서 아웃되지 않는 경우가 더 적었던 선수는 바로 이 시즌의 호세뿐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부처가 외친 탄생게(誕生偈)처럼 호세의 존재로 인해 롯데의 역사는 새롭게 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우리 프로야구 역사가 그랬다. '검은 갈매기' 호세는 그렇게 아주 높이 날았다.


그러나 미륵불(彌勒佛)이 되지 못한, 호세.

하지만 호세의 복귀에도 이 팀의 '가을 야구'는 여전히 꿈이었다. 최종 순위는 전년도 5위에서 오히려 7위로 추락했다. 하지만 극심한 투고타저 속에서도 호세는 22개의 타구를 담장 밖으로 넘겼고, 득점권 타율 역시 .320으로 시즌 평균(.277)보다 높았다.

그래서 시즌 말미, 팬들은 다음과 같은 스페인어로 된 플래카드를 전국 구장 곳곳에 내걸었다. "José, Te necesitaremos tambíen el próximo año!" (호세, 우리는 내년에도 당신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번 시즌 개막전 로스터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킬레스건 부상 때문이었다. 이대호는 홈런을 치고 난 후 '호세 복귀 기원' 세레모니를 선보였고, 호세는 복귀전에서 3안타를 몰아치며 이대호의 기대에 부응했다. 하지만 봄날은 딱 거기까지였다.

무엇보다 홈런이 터지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국내 무대에 데뷔한 이후 호세는 평균 16.6 타석마다 홈런을 하나씩 때려냈다. 부진했다던 지난해에도 22.9 타석당 한번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97 타석만에 겨우 하나를 때려내는 데 그쳤다.

그리고 이 홈런은 신호탄이 아닌 작별인사가 됐다. 팀의 영원한 구세주일 것만 같던 호세가 구단으로부터 퇴단 조치를 받았기 때문이다. 가을 야구를 선물해 줄 것 같던 호세가 가을 야구를 위해 오히려 팀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롯데 팬들은 아마 97 타석만에 터진 그 홈런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작별 선물을 또 그렇게 멋지게 주고 떠나게 됐으니 말이다. 호세, 영원한 부산 사나이. 호세, 누구보다 더 진한 피를 가진 부산 갈매기.


99, 호세

우리에게 호세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이들에게 호세는 그저 말썽꾸러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팬들에게 야구 방망이를 집어 던지고, 상대팀 에이스와 육탄전을 불사하지 않는 다혈질 외국인 선수. 골든글러브를 비롯해 각종 트로피를 둘러싼 소문 역시 결코 듣기 유쾌한 이야기는 못 된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 호세는 열정과 투지의 상징이기도 할 것이다. 동시에 그 누구보다 천진함을 간직한 우리 선수 호세로 기억될지 모르겠다. 관중들과 어울려 '디비디비딥'을 함께 즐기고, 붉은 악마 머리띠를 두른 귀여운 모습의 호세 역시 분명 앞으로 우리가 기억할 그의 모습이다.

어쩌면 이제 우리는 영원히 호세와 조우할 기회를 잃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잊겠는가? 거칠고 투박한 매력을 가진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사직 구장이 떠나가라 외치고 외쳤던 그의 이름을. 그리고 상대에겐 공포였던 그 이름을. 그리고 시즌 중 유명을 달리한 姑 김명성 감독을 추모하며 34번 대신 99번을 등번호로 선택한 착한 제자 호세를,


공교롭게도, 포스트 시즌을 포함해 그가 국내 무대에서 때려낸 홈런 역시 모두 99개다. 언젠가 다시 돌아와 마지막 한 개를 채우겠다는 약속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를 향한 롯데 팬들의 인사 역시 Adiós!(작별의 안녕)가 아닌 Hasta la vista!(다음에 또 봐)인지도 모르겠다.

Hasta la vista, José! 언젠가 또 다른 곳에서 더 멋진 모습으로 만나길.


댓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