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에서 '에이스'는 보통 제1 선발 투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에이스와 제1 선발은 다르다. 고(故) 최동원을 두고 그저 "프로야구 롯데 제1 선발이었다"고 쓰는 건 그가 한국 야구사에 남긴 족적을 설명하지 못한다. 최동원은 롯데의, 아니 한국 야구의 에이스였다.
"승리를 만드는 건 스타가 아니라 팀워크"라는 말은 맞다. 그런데 팀워크는 에이스가 만든다. "동원아, 여기까지 왔는데 우짜노"라는 말에 최동원은 기어코 한국 시리즈 7경기에 모두 등판했다. 늘 팀보다 자기 어깨가 더 무거운 에이스의 숙명을 최동원은 덤덤히 받아들였다. 투구수 100개가 넘어가면 이제 내려갈 때가 됐다는 듯 더그아웃을 쳐다보는 '제1 선발 투수'를 지켜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프로배구 무대도 마찬가지다. 세계적 명성만 놓고 삼성화재 레오(24·쿠바)는 현대캐피탈 아가메즈(29·콜롬비아)와 상대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에이스 풍모가 느껴지는 건 역시 레오 쪽이다. '정규리그 결승전'이었던 9일 현대캐피탈 경기에서 레오는 49득점을 퍼부으며 팀에 3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선물했다. 몰방(沒放)이라고 매도해도 좋다. 최동원 역시 몰방 덕에 에이스 지위를 얻었으니 말이다.
이 경기 2세트 때 16-20까지 뒤져있던 현대캐피탈이 막판 추격을 펼치면서 23-23 동점이 됐다.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이 선수 교체 카드를 꺼내 들려고 한 찰나 코트에 있던 선수들은 '우리끼리 해보겠다'고 뜻을 밝혔다. 신 감독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선수들 뜻을 따랐다. 경기가 끝난 뒤 신 감독은 "2세트 때 선수단이 결집한 게 승리 이유"라고 말했다.
맞다. 그 순간 삼성화재 선수단 그 누구도 레오를 의심하지 않았다. 현대캐피탈 선수들 역시 다음 공격이 레오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삼성화재 세터 유광우(29)는 두 번 모두 레오에게 공을 띄웠고, 레오는 득점으로 연결했다. 반면 현대캐피탈 최태웅(38)은 같은 순간 조근호를 선택했다가 세트를, 경기를,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 어쩌면 그게 아가메즈의 현 주소인지 모른다. '우리가 목숨 걸고 에이스 자존심을 지켜주겠다'는 끈끈함을 동료들에게 안겨 주지 못하는 공격 제1 옵션 말이다.
에이스라는 말은 적기를 5대 이상 격추한 공군 조종사에게 붙이는 칭호에서 유래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적기(352대)를 추락시킨 에리히 하르트만(1922~1993)은 이 기록보다 요기(繇機·wingman)를 단 한 대도 잃지 않은 걸 더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레오는 코트 밖에서도 회식 자리를 주도하는 캐릭터로 유명하다. 반면 아가메즈의 코트 밖 생활에 대해 들려오는 풍문은 그리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그게 에이스와 공격 제1 옵션 차이고, 몰방배구만으로는 설명할 수 있는 삼성화재의 힘 아닐까.
원래 스포츠면 기자 칼럼은 'IN&OUT'으로 썼던 글인데 지면에서 빠지는 바람에 블로그에 남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