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와 아마추어는 다릅니다. 한국전력 전광인(22·사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배구도 그랬습니다. 전광인은 4일 현재 경기당 평균 20득점으로 토종 선수 가운데 1위(전체 5위), 세트당 서브 에이스 0.368개로 역시 토종 선수 중 1위(전체 4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공격성공률(55.05%) 전체 6위가 초라해 보일 지경입니다. 단언컨대 프로배구 올 시즌, 아니 사상 최고 남자 신인은 전광인입니다.
좋든 싫든 프로배구는 외국인 선수 몰방(沒放) 배구가 기본 옵션입니다. 자연히 토종 공격수들은 '외국인 선수가 해주면 된다'면서 뒤로 물러나게 마련입니다. 공격 기회가 줄면서 해결사 본능을 잊는 것이죠. 그 탓에 대학시절 펄펄 날면서 드래프트 1순위로 뽑혔던 선수들도 프로 무대에 와서는 순한 양이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현재 최고 토종 거포로 손꼽히는 현대캐피탈 문성민(27)도 그랬습니다. 독일에서 활약하고 2010~2011 시즌에야 국내 무대에 복귀했지만 데뷔 첫 해 성적은 17.5득점밖에 안 됐습니다. 심지어 공격만 하면 되는 라이트로 뛰었는데도 그랬죠. 다른 선수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시즌 | 선발팀 | 이름 | 평균 득점 | 공격 성공률 | 서브 에이스 | 비고 |
2005 | 대한항공 | 신영수 | 7.0 | 46.59% | 0.064 | |
|
||||||
2006~2007 | 대한항공 | 김학민 | 8.6 | 44.62% | 0.183 | |
2007~2008 | LIG손해보험 | 김요한 | 6.9 | 41.31% | 0.156 | |
2008~2009 | 한국전력 | 문성민 | 17.5 | 54.85% | 0.297 | 2008~2010 해외 진출 |
2009~2010 | 우리카드 | 강영준 | 13.9 | 49.41% | 0.077 | |
|
||||||
2011~2012 | 우리카드 | 최홍석 | 14.4 | 49.18% | 0.174 | |
2012~2013 | LIG손해보험 | 이강원 | 3.6 | 48.94% | 0.091 | |
2013~2014 | 한국전력 | 전광인 | 20.0 | 55.08% | 0.368 | 4일 현재 |
순수 신인으로 프로와 아마추어 벽을 허무는 데 제일 가까이 간 선수는 사실 전광인의 팀 선배 박준범(25)이었습니다. 하지만 박준범은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돼 2011~2012 시즌이 끝난 뒤 한국배구연맹(KOVO)에서 영구제명한 상태입니다. 아버지 박형룡(52)과 함께 부자 국가대표가 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그걸로 끝이었죠. 이때 한국전력(당시 KEPCO45)에서는 박준범뿐 아니라 김상기(33) 임시형(28) 최일규(27) 등이 같은 혐의로 영구제명 당했습니다.
올 시즌을 앞두고 17년 만에 친정 팀에 돌아온 신영철 감독(49)은 "팀을 맡고 보니 남아 있는 선수들은 대부분 수련 선수(연습생)급이더라"고 아쉬워하면서도 "C급 선수가 하루 아침에 A급으로 될 수는 없다. 이런 선수들은 꾸짖기보다 잘하는 부분을 키워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선수단에 패배주의가 만연했을 때 필요한 건 돌파구를 찾아줄 리더. 신 감독이 "쓸 만한 선수"라고 표현한 건 방신봉(38) 하경민(31) 같은 베테랑 선수들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경기 후반 발이 무거워지게 마련이었죠. 그래서 신 감독은 대신 젊은 전광인을 리더로 키우기로 작정했습니다.
지난달 30일 LIG손해보험 경기에서 신 감독은 전광인에게 "너 혼자 배구해? 어디서 그런 배구를 배웠냐"며 꾸짖었습니다. 이미 2-0으로 앞선 경기를 두 번 연속 2-3으로 역전패한 데다 이날 4연패 위기에 몰리자 나온 장면. 신 감독은 "앞장서서 동료들을 독려하고 각자가 가진 힘 이상을 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줘야 하는 선수가 (전)광인이다. 그런데 그 날은 팀을 믿지 못하고 자꾸 혼자서만 해결하려 했다"며 "다음 날 어깨 주물러 주면서 다 풀었다"고 말했습니다.
#kovo #한국전력 "선수들이 아직도 위기 때 나쁜 습관이 나온다. (전)광인이도 아직 어리다 보니 흥분할 때 많아. 다음날 어깨 주무르고 풀어줬다(웃음)."
— sportugese (@sportugese) December 3, 2013
전광인도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전광인은 3일 경기에서 대한항공에 3-0으로 승리를 거둔 뒤 "경기 끝나고 감독님 말씀을 되짚어 보니 정말 가슴에 와닿았다. 사실 이렇게 지는 경기만 하는 게 배구 시작하고 처음이라 많이 힘들었는데 더 힘을 내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전광인은 이 경기에서 공격 성공률 65.22%를 기록하며 팀 공격을 이끌었습니다. 그 덕에 한국전력은 프로 출범 후 처음으로 대한항공을 3-0으로 완파하는 역사를 썼습니다.
#kovo #한국전력 전광인 "그때 내 생각에도 혼날 경기였다. 저한테 약이 된 경기."
— sportugese (@sportugese) December 3, 2013
박준범이 프로와 아마추어 벽을 거의 깨뜨리려고 했을 때 한국전력의 외국인 선수는 밀로스(27·몬테네그로)였습니다. 올해도 밀로스는 한국전력에서 뜁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밀로스가 '특급' 선수는 못 되죠. 하지만 거꾸로 그래서 전광인에게 '해결서 본능'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전광인은 "무엇보다 한 라운드 전승을 해보는 게 목표다. 6연승을 해 보면 우리 팀이 강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덧 리더의 풍모를 느낄 수 있는 발언입니다. 꼴지의 반란을 언제든 기다리는 저로서도 꼭 보고 싶은 장면이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