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야구 팬커뮤니티 사이트 파울볼 사용자 2002년6차전 님께서 쓰신 류현진, 시대를 거스른 에이스의 로망(파울볼 ID 필요)에서 모티프를 따왔으며 중간 중간 거의 통째로 인용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글 베끼기(?)를 허락해주신 2002년6차전 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__)
에이스 시대 몰락
'우크라이나의 검은 악마' 에리히 하르트만(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국 비행기 352대를 격추시켰다. 2차 대전은 물론 인류 역사상 이보다 적기를 많이 격추한 조종사는 없다. 세계 공군은 적기를 5대 이상 격추시킨 조종사를 '에이스'라고 부른다. 하르트만이야 말로 슈퍼에이스였던 셈이다.
현재 전 세계 최고 에이스는 이스라엘 공군 출신 지오라 엡스타인. (현재는 제대 후 민항기를 조종한다.) 엡스타인이 격추시킨 적기는 17대뿐이다. 제트기 시대가 열리면서 공중 전술 자체가 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에이스 시대는 이미 오래 전 저물었다. 게다가 미 공군은 이미 무인 전투기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공군에서 에이스가 갖는 지위와 위상은 지금과 많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는 건 확실히 차원이 다른 일이니 말이다.
박철순, 장명부, 최동원… 그리고 현대 야구
우리 프로야구 초창기도 에이스 시대였다. 각 팀 에이스들은 팀이 필요로 하면 언제든 마운드에 올랐다. 핑계는 필요치 않았다. 에이스라면 반드시 감내해야 할 숙명이었다.
그래서 80경기밖에 치르지 않았던 프로 원년 박철순은 224와 3분의 2이닝을 던졌다. 그는 7년 반이 지난 뒤에야 통산 성적에 200이닝을 추가할 수 있었다.
장명부는 1983시즌 전년도 꼴찌팀을 거의 정상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가 이 시즌 기록한 427과 3분의 1이닝은 두 시즌으로 나눠도 무리인 숫자다.
최동원은 1984년 한국 시리즈 때 혼자서 김시진, 김일융, 이만수, 장효조를 쓰러뜨렸다. 정규 시즌 때 284와 3분의 2이닝을 던진 뒤였다.
1980년대는 그런 시기였다. 에이스는 곧 그 팀의 희망이었다. 아니, 에이스가 곧 그 팀이었다. 자기 공 말고는 믿을 게 아무 것도 없는 존재. 그래서 에이스는 늘 외로웠다. 그의 어깨는 늘 팀보다 무거웠다.
"너희들의 운명을 우에스기(上杉) 한 사람에 맡겼다 이거군."시대가 바뀌었다. 우리는 여전히 각 팀 에이스가 누구인지 안다. 그러나 에이스는 팀의 제1 선발을 일컫는 표현일 뿐이다. 5인 로테이션은 상식이 됐고, 웬만한 선발 투수 못잖은 불펜진이 뒤를 받친다. 에이스를 경기 중반에 투입한 감독은 팬들의 집중포화를 받기 십상이다.
"그렇죠. 우에스기가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그걸로 메이세이(明星)는 THE END."
-아다치 미츠루, '터치' 21권 중에서
현대 야구는 팀 대 팀으로 모든 역량을 걸고 싸우는 장기 레이스다. 에이스의 시대는 이미 오래 전 끝났다. 아니, 에이스의 지위는 여전하다. 에이스는 팀원들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대상이다.
류현진이 있으라!
그래서 류현진의 야구는 다르다. 류현진이란 이 고고한 에이스는 여전히 팀을 지키는 주체다. 마치 옛날 야구 만화 주인공처럼 류현진은 다른 에이스들과 다른 시대를 산다.
소속팀 한화는 올해 압도적인 꼴찌다. 굳이 기록을 열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류현진이 등판하는 날은 다르다. 류현진이 선발로 나선 한화를 상대로 승리를 확신하는 상대팀이 얼마나 되겠는가. 한화 팬들은 '그래도 류현진'을 떠올리며 승리를 기대하고 상대 팀은 '오늘은 류현진'이라며 반쯤 포기한다.
류현진과 함께 한화는 완전히 다른 팀으로 변모한다. 류현진의 평균자책점은 2.87. 한화의 팀 자책점과 거의 2점 가까운 차이다. 팀 수비력을 이 정도로 끌어올리는 투수는 21세기 들어 아무도 없었다.
류현진이 등판한다고 다른 선수들이 좋아지는 건 아니다. 타선에선 김태균이 고군분투할 뿐이며, 수비는 여전히 허술하다. 구원조차 기대할 수 없다. 한화는 마무리 투수가 누구인지조차 불확실하다.
하지만 류현진은 묵묵히 던진다. 수비진 도움은 기대도 않는다는 듯 오만하게 상대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운다. 구원진은 필요 없다는 듯 8, 9이닝을 버텨낸다. 타선은 2점, 3점만 뽑아줘도 충분하다는 듯 상대를 틀어막는다.
류현진이 올 시즌 7이닝 2자책점을 기록한 건 모두 6경기. 이 6경기에서 류현진의 성적은 무승 3패다. 그래도 그저 이 악물고 버티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류현진 같은 에이스는 이제 남아 있지 않다. 그 누구도 류현진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래서 사실 그는 참 많이 외로울 것이다.
에이스가 있으라!
사실 내게 처음으로 야구의 진짜 매력을 알게 해준 건 박정현(태평양 돌핀스)이었다. 사실상 신인이었던 박정현은 1989년 준 플레이오프 1차전 선발로 나섰다. 그는 이 경기에서 14이닝을 던졌다. 만약 김동기가 14회말에 끝내기 홈런을 치지 않았다면 15회에도 마운드에 올랐을 것이다.
대구에서 2차전을 내준 뒤 1승 1패로 맞선 채 시작한 3차전. 태평양 선발은 정명원이었지만 박정현은 4회부터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물러날 곳이 없는 단기 시리즈의 최종전. 결국 에이스가 자기 어깨에 모든 짐을 얻어야 했다.
박정현은 9회 2까지 상대 타자를 2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그때 갑자기 팬들이 술렁였다. 박정현은 절뚝거리며 마운드에서 걸어 내려왔다. 결국 이 경기는 곽권희의 끝내기 안타로 태평양이 차지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던 순간에도 끝내 에이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건 해태와 치른 플레이오프 내내 마찬가지였다.
맞다. 그때는 1980년대였고 정규 시즌 때 242와 3분의 2이닝을 던진 투수가 포스트시즌에 혹사 당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공 100개를 던지면 투수 교체를 고려해야 한다는 건 사람들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걸 투혼이라고 불렀고 덩달아 우리 가슴도 불타올랐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박철순, 장명부, 최동원, 선동열, 박정현, 염종석, 박충식이 있었다. 그 방식이 옳았다는 건 아니다. 지금이었다면 박정현이 서른하나에 유니폼을 벗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솔직히 그 시절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공 100개가 넘어가면 내려갈 때가 됐다는 듯 더그아웃을 쳐다보는 투수들을 지켜보는 건 참기 힘든 일이다. 터무니없이 강력하고 그래서 그만큼 오만했던 에이스들이 사무치게 보고 싶다. 어쩐지 류현진이 대견스러운 건 그가 유일하게 시대를 거슬러 '에이스의 로망'을 지키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르트만은 전쟁 기간 내내 요기를 단 한 번도 잃지 않았다고 한다. 352대를 격추한 것보다 이게 진정한 자랑이라고 했다. 그렇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마운드 위에서라면 배짱을 잃지 않았던 그 에이스들이 너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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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쓰고 나니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