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김지연(24·익산시청)이 영국 엑셀 런던 사우스 아레나에서 1일(현지 시간) 열린 런던 올림픽 여자 사브르 개인전 결승에서 소피아 벨리카야(러시아)와 경기를 벌이고 있는 장면입니다. 칼과 수트 모양만 가지고도 이 펜싱 종목이 사브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펜싱은 기본적으로 '칼싸움'입니다. 서양에서 군인 또는 귀족들이 칼 들고 싸우던 걸 스포츠 형태로 바꾼 게 바로 펜싱이니까요. 우리는 펜싱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스포츠 종목 이름을 떠올리지만 사실 칼 싸움 자체도 영어로 'fencing입니다.

 

올림픽을 보면 펜싱을 크게 △에페(épée) △플뢰레(fleuret) △사브르(sabre) 등 세 종목으로 나눈 걸 알 수 있습니다. 종목에 따라 공격법(찍기, 베기)과 공격 가능 부위 같은 게 서로 다릅니다. 서로 공격 목적이 다르면 칼도 다르겠죠? 사실 이 종목 이름은 각각 칼 이름이기도 합니다.

 

맨 왼쪽에 있는 칼이 플뢰레, 그 다음이 에페, 마지막이 사브르입니다. 이 세 칼은 손잡이 모양도 다르고(이건 같은 종류라고 해도 다를 수 있습니다.) 손잡이 앞에 있는 가드 모양도 서로 다릅니다. 길이와 유연함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칼날 단면도 제각각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몰소드 (Small Sword)

현대 펜싱 칼 직접 조상은 스몰소드(Small Sword·오른쪽 사진)입니다. 이 칼은 17~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 퍼져 나갔습니다. 이전까지는 서민도 호신용 또는 결투용으로 칼을 차고 다니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총을 발명한 뒤로 칼은 살상 무기라는 기능이 떨어지게 됐습니다. 그래도 명예를 걸고 싸워야 하는 장교 또는 귀족 계층에게는 칼이 여전히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전 세대에 유행했던 레이피어(Rapier)를 좀더 짧고 가볍게 만든 칼이 유행하게 됩니다. 이 칼이 바로 스몰소드입니다.

 

이때 중요한 변화가 하나 더 생깁니다. 결투를 법으로 금지한 것. 빈번한 살상이 문제였습니다. 그렇다고 명예를 걸고 싸워야 하는 일이 갑자기 줄어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결투는 치르되 상대 목숨은 빼앗지 않을 만한 무기(칼)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온 칼이 바로 에페입니다.

 

 

에페

당시 사람들은 결투 때 '퍼스트 블러드(First Blood)' 규칙으로 승패를 정했습니다. 목숨을 빼앗지 않는 대신 피를 먼저 흘리는 사람이 결투에서 패했다고 간주하는 방식이습니다. 목숨을 잃을 위험이 사라졌어도 결투는 여전히 실전이었습니다. 몸 어느 부위에서든 먼저 피를 보이는 쪽이 명예를 잃는 싸움이었습니다.

 

칼을 손에 들고 싸우면 가장 공격 받기 쉬운 곳도 손입니다. 지금도 에페 칼은 손을 보호하는 가드가 큽니다. 또 실전 규칙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공격 우선권이 없습니다. 두 선수가 동시에 (정확하게는 25분의 1초 차 이내에) 찌르기에 성공했다면 양 선수에게 모두 점수를 줍니다.

 

(눈썰미가 빠른 분이라면 위에 나온 에페 칼하고 손잡이가 다른 모양이라는 걸 아실 겁니다. 이 사진에 보이는 손잡이 모양은 마개형 그립·French Grip. 아래 플뢰레와 같은 모양은 손잡이형 그립·Pistol Grip이라고 합니다. 에페에서도 많은 선수들이 피스톨 그립을 쓰지만 우리 선수들은 프렌치 그립을 선호합니다.)

 

 

플뢰레

실전 결투를 앞둔 선수에게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연습 때는 굳이 무거운 칼을 들 필요가 없겠죠? 또 연습 중에 다치는 일을 줄이려면 칼이 좀더 잘 휘고 칼 끝도 뭉툭하면 좋을 겁니다. 그래서 나온 게 플뢰레입니다. 에페가 약 770g 정도 나간다면 플뢰레 는 500g 기준이고 더 잘 휩니다.

 

또 결투에서는 이기는 것보다 지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실전으로 말하자면 살아남는 게 중요했던 것. 그래서 공격을 당했을 때 피해가 큰 부분, 즉 몸통을 보호하는 데 만전을 기했습니다. 현재 플뢰레 종목이 머리와 팔을 제외한 상체를 공략 대상으로 하게 된 이유입니다.

 

플뢰레가 연습에서 실전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결투 규칙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공격 우선권(Priorité)을 인정하게 됐다는 게 제일 큰 특징입니다. 판정에 전자 장비를 사용하게 된 현재는 상대방보다 0.3초 늦게 공격하더라도 우선권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플뢰레에서는 수비를 확실하게 한 다음에 공격을 해도 늦지 않습니다.

 

 

사브르

그럼 사브르는 뭘까요? 사브르는 기마병이 쓰던 칼에서 유래했습니다. 말을 타고 싸우니까 무조건 상대를 찌르기만 할 수는 없었겠죠? 현재 사브르 종목이 찌르기뿐 아니라 베기도 인정하는 이유입니다. 위에 나온 두 종목보다 경기 스타일이 과격하고 자연히 점수도 빨리 올라갑니다.

 

예전에 말은 지금으로 치면 탱크 같은 기갑 무기였습니다. 그래서 적장은 죽이더라도 말은 살려두는 게 중요했습니다. 말을 다치지 않게 하려면 적장 허리 위를 공격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제는 말을 타고 경기하지는 않지만 사브르 종목 유효 공격 범위는 허리뼈 위로 굳은 상태입니다. 말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되는 상태인 겁니다.

 

또 결투 관습이 바뀐 뒤 스포츠로 굳어졌기 때문에 플뢰레와 마찬가지로 공격 우선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플레뢰와 사브레는 '관습 종목'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펜싱!

사용하는 칼과 공격 유효 범위가 서로 다르면 전술도 물론  다르게 마련입니다. 일단 플뢰레와 사브르는 공격 우선권 제도가 있습니다. 점수를 따려면 상대방보다 먼저 공격을 시도해야 합니다. 공격을 당했다면 '막고 찌르기' 기술을 써야 점수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상대 칼을 먼저 한번 쳐내야 하는 것. 이런 과정 없이 공격를 시도하면 상대에게 점수를 내주게 됩니다.

 

이 우선권과 공격 유효 범위를 합쳐 생각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공격 우선권을 가진 선수가 무효 범위를 공격했다고 칩시다. 이때 공격을 받은 선수는 유효 범위를 찌르는(혹은 베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럼 누구 점수가 올라갈까요? 정답은 '어느 쪽도 올라가지 않는다'입니다. 공격 우선권을 가진 선수에게 점수를 준다는 기본 원칙을 지키는 겁니다.

 

그렇다고 규칙이 무조건 '에페 vs 플뢰레·사브르'로 나뉜 건 아닙니다. 사브르에서는 뒷발이 앞발 앞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또 위에 쓴 것처럼 베기를 허용한다는 것도 다른 점입니다. 점수가 빨리 나기 때문에 1라운드에서 8점을 얻으면 1분 휴식을 취한다는 점도 다릅니다. 그래서 남자 사브르 경기를 보다가 여자 에페 경기를 보면 속도가 확 줄어듭니다.

 

이번 런던 올림픽 때 한국 대표팀은 유럽 텃세 탓에 억울한 일을 겪은 게 사실. 그래도 그 어떤 펜싱 강국도 이번 올림픽 개인전에서 금메달 2개를 따내지 못할 만큼 전 세계적으로 전력이 평준화된 상태입니다. 모르고 봐도 신나지만 알고 보면 조금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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