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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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 2

이봉주는 '2등'이다.

이봉주가 공식 대회에서 처음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것은 1991년 전국체육대회였다.

2시간19분15초. 은메달이었다.

이듬해 전국체전에서 1위를 차지하고 1993년 같은 대회에서 한국최고기록을 세웠지만 우리나라 대표 마라토너는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였다.

많은 국민들이 올림픽 2연패를 기대한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이봉주는 3초 차이로 2등에 그쳤다.

2000년 동경국제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7분20초로 한국최고기록을 세울 때도 대회 순위는 2등이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이봉주는 24위에 그치며 사람들 머릿속에 '한물 간' 선수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그해 이봉주는 우리 나이로 서른하나였다. 동갑내기 황영조는 스물다섯에 운동화를 벗었다.

2004년 아테네, 2008년 베이징 올림픽까지 그는 4회 연속 마라톤에 출전했지만 이봉주의 금메달을 기다리는 팬은 거의 없었다.


# '봉달이' 이봉주

이봉주는 '짝발'이다. 왼발(248mm)이 오른발(244mm)보다 4mm 더 길다.

선한 인상을 주는 처진 눈매도 흘러내리는 땀을 막기엔 역부족.

마라톤을 하기에 썩 좋은 신체조건은 못 된다.

이봉주는 "반바지 하나면 되니까" 마라톤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는 19년 동안 정말 '묵묵히' 뛰었다.

짝발이 고통스러우면 통증이 없어질 때까지 뛰었고, 땀이 흘러내리면 '성형외과' 수술대에 올랐다.

경기 전 사흘은 오로지 쇠고기, 나흘은 짜장면만 먹는 식이요법도 견뎠다.

이봉주는 매일 연습으로 30km를 뛰었고, 그가 풀코스 도전에 포기한 것은 겨우 두 번뿐이다.


# 39 → 40

2007년 3월 이봉주는 서울국제마라톤에서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돌아온 반응은 "그래도 마지막에 한 번은 우승 하는구나."

사실 이 우승은 이봉주의 국제대회 일곱 번째 우승이었다.

이봉주는 아시안게임에서 2연패를 달성했고, 보스턴 마라톤 챔피언 자리에도 올랐다.

이봉주보다 풀코스를 많이 완주한 선수도 없다.

14일 현재까지 이봉주는 마라톤 풀코스를 서른아홉 번 달렸다.

2위 기록은 '달리는 철학자' 스티브 모네게티(호주)의 스물다섯 번이다.

한국 최고 기록은 물론 상위 10위 기록 중 4개도 이봉주의 것이다.

이봉주는 15일 생애 마흔 번째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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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42.195km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이 말한 것처럼 마라톤은 승부가 아니라 '경험'이다.

그 경험에 있어 그 누구도 이봉주를 따라오지 못한다.

그는 실력에 비해 늘 저평가 받았다. 아스팔트 위가 아닌 필드 위를 뛰어야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의 마라톤 인생 자체가 마라톤이었다.

물고기는 헤엄치고, 새는 날고, 이봉주는 달린다.

언젠가 2009년 3월 15일은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마라토너가 마지막 42.195km를 달린 날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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