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사라 바만야르(24·이란·왼쪽)와 미야하라 미호(宮原美穗·27·일본)가 맞붙은 항저우 아시안게임 가라테 구미테(組手·겨루기) 여자 50kg급 동메달 결정전. 대회 조직위원회 제공

이번 항저우(杭州) 아시안게임에서 가장 많은 나라가 메달을 가져간 종목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사진에서 보신 것처럼) 가라테(空手)입니다.

 

이번 대회 46개 참가국 가운데 25개 나라가 가라테에서 메달을 최소 1개 이상 수확했습니다.

 

캄보디아와 팔레스타인 모두 이번 대회에서 따낸 유일한 메달이 가라테 동메달이었습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가라테 가타(形·품새) 남자 개인전 동메달을 딴 박희준. 대회 조직위원회 제공

가라테가 처음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이 된 1994년 히로시마(廣島) 대회부터 따지면 총 31개 나라가 이 종목에서 메달을 딴 적이 있습니다.

 

같은 기간 아시안게임 육상 메달을 하나라도 딴 나라와 같은 숫자입니다.

 

이 기간 아시안게임 육상에 걸려 있던 메달은 총 1112개로 가라테(387개)보다 2.9배 많았습니다.

 

한국 선수 가운데서도 이번 대회 남자 가타(形) 동메달리스트 박희준(29)을 비롯해 총 9명이 아시안게임 가라테 (동)메달을 따냈습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가라테 구미테 남자 75kg급 금메달리스트 누르카나트 아지카노프(22·카자흐스탄). 카자흐스탄 체육부 홈페이지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때까지는 가라테 종주국 일본이 종목 순위 1위였지만 이번 대회 때는 카자흐스탄이 선두에 올랐습니다.

 

일본 가라테 관점에서는 반가운 일이라고 하기 어렵지만 '국제 저변'이라는 차원에서는 의미있는 결과입니다.

 

한국 태권도가 2020 도쿄(東京) 올림픽 때 '노 골드'에 그친 것도 개인적으로는 똑같이 평가합니다.

 

'실력자'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는 것이야 말로 종목이 세계화에 성공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니까 말입니다.

 

2020 도쿄 올림픽 태권도 남자 68kg급 패자부활전을 벌이고 있는 미라셈 호세이니(25·이란·왼쪽)과 이대훈(31). 도쿄=로이터 뉴스1

뉴욕타임스는 도쿄 올림픽 때 '태권도가 스포츠 약소국에 올림픽 메달을 선물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아시안게임 레벨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한국은 1986년 서울 대회 때 태권도가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이 된 뒤 한 번도 종목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없습니다.

 

역대 아시안게임에서 태권도 메달을 따 본 나라 숫자도 27개로 가라테보다 적습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가라테 구미테 남자 67kg급 맞대결 중인 파헤드 알아즈미(21·쿠웨이트·왼쪽)와 압델 하르만 알마삿파(27·요르단). 대회 조직위원회 제공

그렇다면 아시안게임에서는 가라테가 태권도보다 더 관대한 종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아시안게임 참가 선수는 1만1910명으로 도쿄 올림픽(1만1420명)보다 더 많습니다.

 

아시안게임이 그저 대륙별 대회라고 쉽게 무시할 수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한국 팬들이 '그거 일본에서나 하는 거 아냐?'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카라테는 그렇게 조금씩 '파이'를 키워가고 있습니다.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은메달에 그친 신준식(43·왼쪽). 동아일보DB

원래 올림픽 정식 종목을 채택할 때는 비슷한 종목 가운데 하나만 고르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 대회를 통해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면서 가라테는 정식 종목이 될 기회를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어젠다 2020'을 통해 개최국에 일부 정식 종목 선택 권한을 주면서 가라테는 도쿄 올림픽 때 드디어 정식 종목이 됐습니다.

 

가라테는 내년 파리 올림픽 프로그램에서는 빠졌지만 2028년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때 다시 들어갈 가능성이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아시안 게임 여자 가타 개인전 3연패 주인공이자 도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시미즈 기요(淸水希容·30). 항저우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제공

네, 가라테 경기는 사실 제법 지루합니다.

 

격투기인 주제에(?) 상대를 '제대로' 타격하면 실격 처분을 받는 이상한 종목이니까요.

 

문제는 태권도 역시 그만큼 재미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태권도는 올림픽 영구 종목이라고 마냥 안심하고 있다가는 가라테에 한 방 크게 맞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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