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은 확실히 특별한 컵입니다. 우승 트로피(사진)를 아무리 살펴 봐도 어디에 무엇을 따라 먹으라는 건지 알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한국인은 대부분 월드컵이라는 낱말을 통째로 받아들이실 테니 엉뚱하게 들리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월드컵은 영어로는 'World Cup'이고 스페인어로는 'Copa Mundial'로 컵이라는 낱말이 분명 들어갑니다. 한자 문화권에서도 '世界杯'라고 컵(杯·잔 배)을 넣어 표현합니다. 월드컵은 확실히 컵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건 1970년까지 이 대회 우승 트로피로 썼던 쥘리메컵(줄리메컵)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쥘리메컵은 승리의 여신 '니케'가 잔을 머리에 지고 있는 진짜 컵 모양이었습니다(사진).
(브라질은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때 정상을 차지하며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세 번째 우승한 나라가 됐습니다. 이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브라질은 이 트로피를 영구 보관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지만 1983년 도난당하고 말았습니다. 쥘리메컵을 훔쳐간 일당은 이를 녹여 금괴로 팔아 먹었기 때문에 트로피 원본은 영원히 볼 수 없게 됐습니다.)
사실 월드컵 트로피를 잔 모양으로 만든 게 전혀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각종 스포츠 대회에서 '우승컵'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트로피 자체가 원래 컵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니까요.
국제 스포츠 대회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건 1851년 시작한 아메리카컵(America's Cup) 요트 대회입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당연히) 아메리카컵을 받아 아래 사진처럼 활용합니다. 우승 기념 축배를 드는 것.
이렇게 액체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부상(副賞)으로 주기 시작한 건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556년부터 4년에 한 번씩 파나텐 축제를 열었습니다.
파타텐 축제는 기본적으로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제사였습니다. 아테나는 지혜의 여신이자 전쟁의 여신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축제 기간에는 스포츠 경기나 음악 콩쿠르 같은 각종 대회가 활발하게 열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대회 우승자는 암포라(amphora)라고 부르는 항아리(사진)를 상으로 받아 갔습니다. 하필 항아리를 부상으로 선택한 건 아테나가 도기(陶器·도자기 그릇)의 여신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암포라 안에는 포도주나 올리브유를 담아주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전통이 다시 부활한 건 아직 영국 식민지 상태였던 현재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이었습니다. 17세기 후반 이 지방에서는 경마 경기가 활발했는데 우승자는 은(銀)으로 만든 컵을 받았습니다. 미국 미시건주에 있는 헨리 포드 박물관은 1699년 세상에 나온 '킵 컵(Kyp Cup·아래 사진)'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컵을 만든 은 세공업자 이름이 제시 킵이라 킵 컵입니다.)
이 전통을 이어 스포츠 대회에서는 컵 모양으로 우승 트로피를 만드는 게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됐습니다. 지금도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챔피언이 받는 트로피 이름은 '스탠리컵'(사진)이고 윗 부분이 정말 컵 모양입니다. 프랑스 오픈 남녀 단식 테니스 대회 챔피언 역시 각각 머스킷티어컵과 수잔랭글랭컵을 받습니다.
또 우승 트로피가 컵 모양이 아닐 때도 '우승컵'이라는 표현을 흔히 쓰기 됐습니다. 자연스레 아예 대회 이름에 -컵이나 -배가 붙는 게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됐습니다. 예컨대 한국배구연맹(KOVO)에서 정규리그 시즌이 아닐 때 여는 대회 이름은 KOVO컵이고, 실업배구 시절에는 '대통령배 배구 대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FIFA 월드컵 역시 이런 역사적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우승 트로피를 컵 모양으로 만들었다가 지금은 컵과 별 상관이 없는 모양인데도 계속 월드컵이라고 부르고 있는 건 이 때문입니다.
참고로 FIFA는 쥘리메컵 도난 이후 우승 트로피(FIFA 컵)에 대한 보안 정책을 강화했습니다. 월드컵 우승국조차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레플리카)을 받습니다. 우승 멤버가 진품 트로피를 만져볼 수 있는 건 시상식 때 잠깐뿐입니다.
또 FIFA 월드컵 우승 멤버가 아니면 이 FIFA컵에 아예 손을 댈 수도 없습니다. 월드컵 때마다 직전 대회 우승 팀 (은퇴) 멤버가 개최국을 대표하는 유명 인사와 함께 이 트로피를 들고 나오는 건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