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역시 최민규 형님다운 기사입니다. '최민규의 스포츠 팩트체크' 17일자 제목은 '1923년 휘문고는 고시엔에 갔었다'입니다. 네, 정말입니다. 휘문고보 - 고보·高普는 일제강점기 당시 '고등보통학교'를 줄여 쓰던 말 - 야구부는 1923년 고시엔(甲子園) 그러니까 일본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당시 전일본중등야구선수권대회) 본선에 진출했습니다. 1923년 7월 28일자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대판(大阪·오사카)조일(朝日·아사히)신문사에서 개최하는 전(全)일본 중학교 야구 대회에 만선(滿鮮·만주와 조선)에서 출전할 중학교의 예선과 같은 의미로 개최된 대판조일신문 경성지국 주최의 야구 대회에서는 휘문고등보통학교군(軍·팀)이 작(作·어제) 27일 결승전에(서) 경성중학교군을 10-1로 이기였음으로 대판에 출전할 학교는 휘문고등보통학교로 확정되어 만주와 조선 중학교 야구계의 수석이라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이라더라.



여기서 좀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왜 당시에는 중학교가 이 대회에 나갔을까요? 그리고 휘문고(보)는 왜 중학교 야구부와 경기를 벌였을까요?


먼저 당시 일본에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입니다. 지금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각각 3년씩 나눠 다니지만 1920년대 일본에서는 중학교가 그냥 6년제였습니다. 


조선에서도 경성중처럼 일본인이 다니는 중학교 역시 마찬가지로 6년제였습니다. 조선인만 다니는 고보는 5년제였습니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하면 당시 휘문고보는 지금 휘문중과 휘문고로 나뉘었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1938년이 되면 고보 역시 중학교로 이름으로 바꾸게 됩니다. 이런 '중학교'가 현재 우리가 아는 중·고 시스템으로 바뀐 건 해방 이후입니다. 


그래서 저 당시 경성중을 이야기할 때 흔히 '현 서울고'라는 설명을 덧붙이지만 100% 사실에 부합하는 건 아닙니다. 1909년 일본인 학교로 문을 연 뒤 해방 후(1946년) 서울중으로 다시 개교했다고 보는 게 사실에 더 가깝습니다. 그 후 1951년 서울중과 서울고로 분리했다가 1971년 서울중이 문을 닫았습니다.


또 엄밀하게 말하면 '고시엔행 티켓'이라는 말도 100% 사실에 부합하지는 않습니다. 당시 이 대회는 고시엔이 아니라 나루오(鳴尾)구장에서 열렸습니다. 그때는 고시엔구장에서 이 대회를 열고 싶어도 열 수가 없었습니다. 한신고시엔구장이 문을 연 건 이듬해 8월이니까요. 관용적인 뜻에 고시엔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겁니다.


휘문고보가 조선과 만주를 대표해 고시엔 본선에 나갔다는 건 아예 틀린 문장입니다. 이해 대회 1회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휘문고보가 2회전에서 마주한 상대가 바로 만주 대표 다롄상(大連商·다롄상업학교)이었으니까요. 조선과 만주뿐 아니라 역시 일본 식민지였던 대만도 고시엔에 대표 학교를 내보냈습니다.


다롄상을 9-4로 물리친 휘문고보가 8강에서 맞딱뜨린 상대는 리츠메이칸중(立命館中)이었습니다. (물론 이 학교도 지금은 리츠메이칸중·고로 나뉜 상태입니다.) 휘문고보는 리츠메이칸중을 상대로는 5-7로 패하면서 귀국행 배에 몸을 실어야 했습니다. 제일 큰 패인은 팀 대들보나 다름없었던 포수 김정식이 2회전 경기 도중 다쳤기 때문. (김정식은 나중에 다카라즈운도교카이·寶塚運動協會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시엔구장 역사관에 있는 참가 기념구. 사진 제공 신선우 형님


휘문고보가 이 대회에 나간 첫 번째 조선 대표는 아니었습니다. 1921년 부산상업학교(훗날 경남상고·현 부경고) 야구부가 처음으로 조선 대표 자격을 얻어 8강에 올랐지만 당시 부산상 야구부는 한국인이 뛰던 팀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인만으로 꾸린 팀이 이 대회 8강에 오른 건 1923년 휘문보고뿐입니다.


▌'고시엔'에 조선 대표로 참가한 학교 명단

 회수  연도  학교  결과  비고
 7  1921  부산상  8강  현 개성고
 8  1922  경성중  1회전  현 서울고
 9  1923  휘문고보  8강  현 휘문고
 10  1924  경성중  1회전  
 11  1925  부산중  2회전  현 부산고
 12  1926  경성중  8강  
 13  1927  경성중  2회전  
 14  1928  경성중  2회전  
 15  1929  평양중  2회전  해방 후 폐교
 16  1930  대구상  2회전  현 대구상원고
 17  1931  경성상  2회전  나중에 서울대로 편입
 18  1932  평양중  1회전  
 19  1933  선린상  1회전  현 선린인터넷고
 20  1934  경성상  8강  
 21  1935  신의주상  2회전  
 22  1936  인천상  2회전  현 인천고
 23  1937  용산중  1회전  현 용산중
 24  1938  인천상  2회전  2회전
 25  1939  인천상  1회전  1회전
 26  1940  평양제일중  2회전  평양중과 같은 학교


만주와 대만 대표 가운데서도 챔피언에 오른 학교는 없지만 결승전까지 나간 학교는 있습니다. 다롄상은 1926년 대회 때 결승에서 시즈오카(靜岡)중에 1-2로 석패하는 바람에 정상 등극에 실패했고, 자이(嘉義)농림전문학교는 1931년 대만 대표로 나서 결승까지 올랐지만 주쿄(中京)상업학교에 0-4로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모든 일본 야구 소년에게 고시엔은 꿈의 무대지만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는 꼭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울 중앙고(보) 같은 학교는 "일본의 식민지임을 자처하는 것"이라며 아예 예선 참가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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