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야구팬으로 자라면 어쩐지 가슴이 찡한 기분이 드는 순간이 찾아온다. 늘 '아저씨' 아니면 '형'이던 신인 선수가 '친구'가 되고 '동생'이 되는 순간. 유머러스하게 '이제 프로 선수가 되기엔 너무 늦었어'하고 넘기려 해도 어쩐지 가벼운 한숨을 짓게 되는 그런 순간. ※사진은 2013년 자료
스물 셋, 국가대표 1번 타자
프로에서 뛰던 김주찬 김태균 마해영 이병규 홍세완 같은 선수들과 함께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뛰던 대학생 내야수가 있었다. 우리 대표팀은 쿠바 선발 베라에게 3회까지 안타를 하나도 때려내지 못했다. 타순이 한 바퀴 돌고 난 뒤 이 대학생 선수가 대표팀에 첫 안타를 안겼다.그는 이해 대학야구선수권 홈런상을 탔다. 추계리그에서는 타격상 타점상 도루상까지 3관왕을 차지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4년 전 2차 4번으로 자신을 지명했던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는다. 2차 4번은 그리 높은 순번이 아니었지만 유니콘스는 그에게 계약금으로 3억4000만 원을 안겼다.
그가 오면서 유니콘스는 전년도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 퀸란과 재계약을 포기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팀은 이듬해 정성훈을 데려와 퀸란의 빈 자리를 채웠다. 다음해에는 박종호가 자유계약선수(FA)로 떠난 2루수 변신을 시도했지만 또 한번 실패를 겪었다.. 그 다음해 김재박 감독은 박진만이 FA로 떠날 것을 염려해 유격수 변신을 주문했다. 이번엔 병역 비리였다.
결국 그는 2007년 10월에야 병역을 마치고 이미 세(勢)가 기울 대로 기운 팀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듬해 4년만에 1군 무대를 밟았을 그는 어느덧 스물아홉이 돼 있었고, 서른하나가 되어서야 프로 첫 번째 홈런을 때릴 수 있었다.
그가 서른둘로 맞이한 시즌 첫 경기에 그는 주전 2번 타자로 나섰다. 볼카운트 2-3에서 높게 들어온 싱커를 받아쳐 그대로 홈런. 2010 시즌 첫 번째 홈런이었다. 언론은 그를 '똑딱이 무명 타자'라고 소개했다.
서른 둘, 유망주
서른을 훌쩍 넘긴 선수에게 '유망주'라는 낱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도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서른이 넘어서도 여전히 자기 자리가 없는 선수는 응원팀 팬에게도 외면받기 쉽다.어쩌면 2010년 3월 27일 그의 첫 번째 타석이 김민우가 유니폼을 벗게 되는 순간까지 가장 화려한 순간일지 모른다. 화려하게 20대를 보낸 선수가 기량이 떨어지기 시작한대도 '미스터리'라고 부를 나이는 분명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조금 부족하고 늘 어딘가 엉성해도 나는 '민우 형'을 유망주라 부르고 싶다. 매일 경기에 출전하고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세우는 스타 선수들보다 김민우 같은 선수가 우리 삶과 더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주 잔을 앞에 두고 만났을 때 칭찬할 얘기가 너무 많은 사람보다 함께 마음 아파할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이 더 매력적인 때도 있는 법이니까.
2002년 솔트레이크 겨울올림픽에서 '순전히 행운으로' 쇼트트랙 금메달을 딴 브래드 버리(호주)는 기자 회견에서 "이 금메달을 경기를 이겨서 딴 게 아니라 지난 10년간 최선을 다해 땄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언젠가 '민우 형'과 꼭 소주 잔을 기울이면서 이야기할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버리 같은 행운이 없더라도 버티고 또 버틴 그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