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慶北高(경북고)-光州一高(광주일고), 숙명의 격돌'이라고, 정말 대문짝만하게 '미다시'를 뽑은 '日刊(일간)스포츠'로 모자를 만들어 李(이)선배와 나는 하나씩 머리에 썼다./李선배와 나는 안타 하나에 딱 한 잔씩만 하기로 한 소주를 공평하게 다 마셔 버렸다./…/"광주일고는 져야 해! 그게 포에틱 자스티스야."/"POETIC JUSTICE요?"/"그래."/이선배는 나의 몰지각과 무식이 재밌다는 듯이 씩 웃는다./그의 물기 젖은, 싼뿌라찌 가짜 이빨에 햇빛이 반짝거렸다./나는 3루에서 홈으로 生還(생환)하지 못한, 배번 18번 선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본인이 광주일고 졸업생인 황지우(73) 시인은 '5월 그 하루 무덥던 날'에 이렇게 썼습니다.

 

황 시인이 1983년 펴낸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들어 있는 이 작품은 당시 시대 상황을 고교야구 경기에 빗댔다고 풀이하는 게 '정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 제목은 아마도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 구절에서 따왔을 겁니다.)

 

그래도 야구 팬 한 사람으로서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이 경기가 실제로 열린 건 언제였을까.'

 

1975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 결과를 전한 같은 해 5월 15일자 동아일보

일단 유력한 정답 후보는 1975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였습니다.

 

광주일고는 이해 5월 14일 열린 대회 결승에서 '디펜딩 챔피언' 경북고를 6-2로 꺾었습니다.

 

이 경기에서는 나중에 해태(현 KIA)와 청보-태평양에서 뛰는 김윤환(68)이 고교야구 역사상 첫 3연타석 홈런을 치면서 팀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경기는 '포에틱 저스티스'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리고 이날 이후 1983년까지 고교야구 4대 메이저 대회(황금사자기, 대통령배, 봉황기, 청룡기)에서 두 학교가 5월에 맞대결을 벌인 적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지난해까지도 그랬습니다.

 

▌광주일고 4대 메이저 대회 vs 경북고 결과
 날짜  대회  라운드  결과
 1975-05-14  대통령배  결승  6-2 승
 1978-06-15  청룡기  패자결승  1-3 패
 1979-10-02  황금사자기  1회전  4-9 패
 1981-06-16  청룡기  준결승  4-6 패
 1982-04-29  대통령배  2회전  2-4 패
 1982-08-14  봉황기  16강전  8-1 승
 1985-09-25  황금사자기  2회전  4-1 승
 1986-04-21  대통령배  2회전  1-2 패
 1992-09-17  황금사자기  8강전  1-5 패
 1993-06-10  청룡기  준결승  3-8 패
 2007-08-18  봉황기  16강전  2-6 패
 2010-03-27  황금사자기  준결승  10-6 승
 2011-08-03  청룡기  16강전  4-9 패
 2014-07-19  청룡기  2회전  7-13 패
 2023-08-30  봉황기  32강전  4-6 패

 

'지난해까지'를 강조한 건 올해는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겠죠?

 

두 학교는 13일 황금사자기 16강전에서 맞대결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경북고가 11-4로 7회 콜드게임 승을 거뒀습니다.

 

이제 고교야구 경기 결과를 정치적으로 풀이하는 건 확실히 촌스러운 일이 된 게 사실.

 

그래도 고교야구가 4대 메이저 대회 체계를 갖춘 1971년 이후 처음으로 '포에틱 저스티스'를 찾을 수 있게 된 날이기에 기록 삼아 남겨 둡니다.

 

광주일고와 경북고는 프로야구 선수 최다 배출 고교 1위 타이틀을 차지한 적이 있는 유이(唯二)한 학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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