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한국전쟁에도 참전한 바 있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명타자 테드 윌리엄스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Get a good pitch to hit." 치기에 좋은 공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MLB 20세기 마지막 4할 타자의 비결 치고는 너무도 단순한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바로 타자들이 타석에 들어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의 가장 기본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첨언하자면, 타자의 참을성이란 때려봤자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든 투구는 거르거나 커트해 버리고 안타를 만들어낼 수 있는 투구를 기다리는 성향이다. 그 결과 끝끝내 자기가 원하는 공이 들어오지 않으면 걸어 나가거나 또는 기다렸던 공을 힘껏 때려내 질 좋은 타구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참을성이 강조되는 주요 이유인 것이다. 게다가 출루율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최근의 야구 경향을 볼 때, 아마 타자의 참을성에 대한 칭송은 당분간 그치지 않을 걸로 보인다.

하지만 사실 이는 너무도 추상적이다. 그러니까 원론적으로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지나치게 원론적이라는 소리다. 그럼 한번 '05 시즌 우리 리그의 타자들은 어떤 타격 성향을 보였는지를 직접 알아봄으로써 참을성의 실체를 살펴보고, 어떤 타자가 가장 참을성이 있다고 볼 만한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1) 참을성이 강하면 공을 많이 본다?

위에서 언급한 테드 윌리엄스의 표현을 그대로 따르자면, 참을성이 강한 타자는 자신이 원하는 투구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거꾸로 말하자면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상대의 투구를 지켜본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결과 타석에서 다른 선수들에 비해 많은 투구를 지켜보게 된다. 그럼 어떤 타자들이 타석 당 많은 투구수를 지켜봤을까? 그 역의 경우에 해당되는 타자들은 누구일까? '05시즌 300타석 이상을 기록한 타자들을 대상으로 타석당 투구수를 알아보자. 다음은 상/하위 5걸의 명단이다.



GPA는 Gross Production Average의 약자로, 장타율을 과대평가하는 OPS의 단점을 극복하고자 만들어진 지표이다. 출루율이 장타율에 비해 1.8배 정도의 가중치를 갖는다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1.8 * 출루율 + 장타율)/4라는 단순한 공식을 통해 산출된다. 4로 나눈 까닭은 일반적으로 야구팬들에게 익숙한 타율과 유사한 범위를 갖게 함으로써 직관적인 판단을 돕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2할 5푼 정도면 평균, 3할이면 좋은 타자라 불릴 만한 수준이다.

우선 이 다섯 명 가운데 주목할 만한 대상이 있다면 바로 SK의 박경완 선수다. .258의 GPA는 그리 뛰어난 수준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리고 사실 그는 전체 424 타석에서 삼진을 100번이나 당했다. 전체 타석의 23.6% 정도에서 고개를 떨군 채 그대로 덕아웃으로 돌아와야 했다는 뜻이다. 물론 이는 리그에서 가장 높은 기록이다. 그러니까 많은 삼진을 당하는 것 역시 투구수를 늘릴 수 있는 한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브리또 선수가 기록한 타석당 3.44개의 투구수가 '05 시즌 300타석 이상 들어선 타자 가운데서 가장 낮은 수치로 기록됐다. 그런데 그의 GPA는 .276으로 거의 똑같은 타석에 들어선 심재학 선수와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두 선수의 삼진 비율을 알아보면 각각 16.2%와 14.6%를 기록 오히려 심재학 선수의 삼진 비율이 더 높다. 그럼 이런 차이는 어디서 발생한 걸까? 심재학 선수는 타석 대비 볼넷 비율에 있어 12.9%를 기록 브리또의 3.6%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그럼 결국 볼넷이 많은 타자가 좀더 참을성이 있다고 볼 만하지 않을까?


2) 참을성이 강하면 볼넷을 많이 얻어낸다?

흔히들 타자의 참을성을 볼넷을 얻어내는 능력과 연관짓고는 한다. 원하지 않는 공이 들어오면 방망이가 나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참을성을 정의하는 데 있어 주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임으로 틀린 소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 어떤 타자들이 볼넷을 많이 얻어냈을까? 그리고 거꾸로 볼넷을 적게 얻어낸 타자들은 누구일까? 마찬가지로 300타석 이상의 타자들을 대상으로 알아본 타석 대비 볼 넷 비율 상/하위 5걸의 명단이다.



상위 5명의 GPA가 모두 3할 이상이다. 그러니까 이들이 많은 수치의 볼넷을 얻어낸 건, 타자의 참을성 때문이 아니라 방망이가 얻어낸 결과물이라고 볼 만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매서운 방망이의 위력에 주눅 들어 상대 배터리가 승부를 회피한 영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위 5명을 알아보면 이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브리또 선수의 케이스가 특이하다는 걸 감안하자면, 나머지 타자들 모두 평균 이하의 GPA를 기록했다. 그러니까 거꾸로 투수들이 적극적인 공력이 가능한 레벨의 타자였다는 것이다. 물론 GPA에는 출루율이 반영되기 때문에 볼넷의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어느 선수도 소위 '거포'라 불릴 만한 수준은 못 된다. (물론 채거포라는 농담은 있었다.) 그러니까 볼넷 비율은 타자가 위협적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설득력을 갖게 될지 몰라도 참을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3) 참을성이 강한 타자는 서두르지 않는다?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럼 참을성을 다시 어떻게 연관지어야 할까?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 그러니까 참을성이 강하다는 건 기다린다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서두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초구부터 섣부르게 덤비지 않고 승부를 길게 끌고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참을성을 강조하는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마이너리그 팀에서는 초구에는 절대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을 것을 선수들에게 주문하기도 한다. 아래는 초구를 건드린, 그러니까 볼을 인플레이시켰거나, 파울로 걷어 냈거나, 초구에 헛스윙을 한 비율을 알아본, 그러니까 초구를 때리려는 시도를 했던 모든 비율을 알아본 결과물이다.



역시나 초구 공략을 선호하기로 알려진 송지만 선수가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송지만 선수가 서둘러 공격한다고 해서 비난할 필요는 없다. 초구를 공략했을 때 송지만 선수의 GPA는 .420으로 시즌 평균을 훨씬 상회한다. 2루타도 7개나 때려냈고, 전체 홈런 가운데 41.7%에 해당하는 10개의 홈런 역시 초구를 공략했을 때 얻어진 결과물이다. 그러니까 서두른다고 해서 꼭 나쁜 타격 결과가 빚어진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타자를 침착하다거나 참을성이 있다고 부르기엔 무리가 따르는 게 아닐까?



거꾸로 초구를 가장 많이 흘려 보낸 타자는 기아의 심재학 선수다. 역시 초구는 그냥 지켜보기로 소문난 명성 그대로다. 흥미로운 건 초구를 그냥 흘려보낸 비율이 높은 다섯 명 모두 타석당 투구수가 4개 이상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는지도 모르겠다. 위의 표에서는 박용택 선수만이 같은 기록을 올렸다. 게다가 박진만 선수를 제외하자면 모두 수준급의 GPA를 기록했다. 어쩌면 침착성이라는 개념에 좀더 가까이 다가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4) 참을성이 강하면 투수들이 괴롭다?

그럼 한걸음 더 내딛어 보자. 우리가 일반적으로 "저 타자는 참 끈질기네. 투수 좀 괴롭겠어."하고 표현할 때 지적할 수 있는 또 한 가지 지표는 바로 파울이다. 투수 관점에서 볼은 건드리지 않고, 원하지 않는 코스에 들어온 스트라이크는 끊임없이 커트해 내는 타자처럼 괴로운 존재는 또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 타석 당 파울 개수 상/하위 5걸이다. 대상은 마찬가지로 300타석 이상.



흥미로운 건 LG 선수들이 세 명이나 포진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장원진 선수까지 포함할 때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는 타자들이 네 명이다. (별 관련은 없어 보이지만, 이용규 선수 역시 '04 시즌에는 LG 소속이었다.) 물론 이는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홈런이 그리 자주 발생하지 않는 잠실구장을 감안할 때 이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일발장타 위주의 스윙보다는 소위 결대로 때려내는 능력이 좀더 중요한 타격 스타일이 반영됐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는 물론 홈구장뿐 아니라 타자의 타격 성향과도 관련이 있다. 장원진, 이용규 선수의 경우 팀의 테이블 세터진에서 주로 활약한 선수이며, 한규식 선수 역시 하위 타선에서 끈질기기로 소문난 선수다.



비록 상/하위 5명씩에 대한 비교에 불과하지만 파울을 적게 때려내는 타자들이 오히려 GPA가 높아 보인다. 하지만 전체 타자를 대상으로 비교해 보면, 파울을 때려낸 비율과 GPA 사이에 큰 연관 관계는 없어 보인다. 타석 당 파울수 상/하위 20%를 뽑아 GPA와의 R-스퀘어 값을 구해봤지만 커다란 소득이 없었다. 대신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한 타석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스트라이크-파울-볼-볼-볼-파울-파울-파울-파울-파울-파울-파울-파울-타격

풀 카운트가 된 이후에 무려 7개의 파울 타구가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14구째에 드디어 페어 지역으로 타구가 날아갔고 결과는 홈런이었다. 8월 17일 대구 경기, 타자는 삼성의 김한수 선수였고, 투수는 두산의 김명제 선수였다. 그밖에 박용택, 이호준 선수는 한 타석에서 10개의 파울 타구를 때리기도 했다. 9개를 기록한 선수는 장원진, 정수근, 클리어 등 모두 세 명이다.


5) 참을성이 강하면 헛스윙을 하지 않는다?

그럼 이런 건 어떨까? 파울을 때려내는 건 확실히 인상적으로 선수가 끈질기다는 느낌을 들게 만든다. 거꾸로 헛스윙을 남발하면 어쩐지 서두르는 것만 같아 보인다. 그러니까 노려친다기보다 자기 스윙만 너무 고집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는 뜻이다. 특히 공의 로케이션에 전혀 상관없이 정해진 폼으로 똑같은 궤도의 스윙을 그리는 선수들은 팬들의 비난을 받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한번 알아보자.



상위권에 있는 선수들 모두 이 분야에서 나름대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이다. 게다가 상위 세 명의 경우, 일발 장타력이 있는 선수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정의윤 선수 역시 잠실을 홈으로 쓰는 고졸 타자가 8개의 홈런을 때려낸 건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신명철 선수의 경우 주로 팀의 2번 타자로 출장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헛스윙이 많다는 건 팬들에게 그다지 좋은 이미지를 남기기 어려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거꾸로 정교하기로 소문난 타자들이 확실히 이 비율에 있어 상당히 낮은 수치를 보였다. 박종호 선수는 국내 최고의 2번 타자라 불릴 만한 선수며, 김민재 선수 역시 조용준 선수가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타자로 꼽을 정도로 섣불리 방망이가 나오지 않는 선수다. 장성호, 이종범, 김재현 선수는 말할 것도 없이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들이다. 아주 뛰어난 파워를 선보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수준급의 파워 히터이며 아울러 정확한 타격을 선보이는 타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헛스윙이 많아서는 이런 명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다.


6) 다시, 참을성이 강한 타자는 볼을 많이 본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투수를 지치게 하는 한 요인은 유인구, 즉 볼에 속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많은 볼넷을 얻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투수에게 타자 자신이 원하는 코스, 즉 스트라이크를 던지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가장 많은 볼을 기록한 선수의 명단이다.



볼넷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강타자로 손꼽힐 만한 선수들이 포진해 있다. 출루율 1위(.445)답게 김재현 선수가 1위에 랭크됐다. 심정수 선수는 가장 많은 볼넷(85)을 얻어 낸 선수고, 서튼은 2위(78)다. 규정타석에는 미달했지만 김동주 선수 역시 무시 못 할 강타자, 이호준 선수 또한 6월에 월간 MVP로 선정될 만큼 멋진 활약을 보였다. 리스트에는 포함돼 있지 않지만 6위를 기록한 선수는 기아의 장성호 선수(.400)였다.



반면, 확실히 위 리스트에 포함된 선수들은 강한 타격과는 좀 인연이 먼 선수들이다. 정의윤의 경우 고졸 신인으로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높은 파울 비율을 낮추고 볼을 골라낼 선구안이 조금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한규식 선수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는 위 리스트에 포함된 다섯 타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이다. 볼을 골라내지 않고서는 결코 좋을 타자가 될 수 없다.


7) 참을성이 강하면 스크라이크 존이 좁다?

그럼 스트라이크의 경우엔 어땠을까? 그러니까 파울이 아닌 심판의 콜에 의해 스트라이크로 인정된 투구의 경우 말이다.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코스라면 그냥 흘려보내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까? 아니면 존에 들어온 공은 일단 때리고 보는 게 더 도움이 될까? 마찬가지로 상/하위 선수들을 살펴보겠다.



특이한 건, 장성호 선수는 스트라이크도 기다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타석 당 삼진 비율은 9.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규정 타석을 채운 타자 가운데 가장 낮은 수치다. 김민재 선수 역시 9.4% 정도로 삼진을 많이 당하지 않았다. 그만큼 불리한 볼 카운트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는 뜻이다. 특히 장성호 선수의 경우 2스트라이크 이후에도 .271의 타율을 기록하며 리그 평균 .185에 비해 96포인트나 높은 수치를 올렸다. 자신의 시즌 타율(.300)보다는 낮은 수치지만 확실히 칭찬받을 만했다는 뜻이다.



이 리스트엔 사실 오를 만한 후보가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들 소위 배드볼 히터로 이름이 난 타자들이다. 브리또는 스트라이크든 볼이든 가리지 않고 덤볐다. 물론 송지만 선수와 펠로우는 헛스윙에 바빴다. 이병규와 박용택도 사실 덤비긴 했지만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특히, 이병규 선수의 경우 볼을 인플레이시켰을 때 안타로 연결되는 비율을 보여주는 BABIP에서 .375로 리그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는 소위 게스 히팅보다 동물적인 본능으로 안타를 만들어 내는 타자다. 물론 참을성으로 칭찬받기는 힘들겠지만 말이다.

눈치가 빠르신 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05시즌 가장 참을성이 높다고 할 만한 타자는 장성호였다. 장성호 선수는 스크라이크도 볼도 모두 기다렸다. 그 결과 리그에서 타석당 가장 많은 볼 수 있었다. 스윙을 최대한 참았고, 노리는 코스만 골라서 쳤다. 그 결과 8년 연속 타율 3할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다. 게다가 흔히 말하는 FA 대박까지 가능했다.

장성호 선수는 아직 기아를 대표하는 강타자라고 하기엔 여전히 이종범의 벽이 다소 높아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어리고, 좌타자라는 건 분명 강점이다. 참을성이라는 게 정말 타자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는 지금보다도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06 시즌 장성호 선수의 활약에 주목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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