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 1

어릴 때 혹은 살면서 언젠가 한번쯤, 이런 필연적인 고민에 우린 맞딱뜨리게 됩니다. 물론 이보다 원천적인 질문으로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현학적인 물음이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이는 나이를 먹으면서부터 어느 정도 질문 자체를 아예 잊어 버리게 되는 모양입니다. 그럼 이 필연적인 고민이란 무엇인가.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것입니다.

언젠가 n문 n답 같은 걸 작성하다가, '사랑이란?'이라는 질문의 답으로, 정의하고자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 이라고 썼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사실 나름의 구분법을 밝히자면, 저는 '그렇기 때문에' 좋은 건 좋아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건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건 이유를 말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건 이유를 말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여자친구가 좋은 이유를 대라면, 정말 백 가지도 더 댈 수 있습니다. 눈동자가 아름답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깨끗한 피부, 그 까칠한 성격까지… 그러나 왜 그녀를 사랑하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니까, 하는 답변으로도 불충분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영역은 남으로부터의 침범을 허락하고 싶지 않은, 어떻게 해서든 지켜내고 싶은 - 어제 처음 본 <서동요>의 표현을 빌리자면 ; 연모(戀慕)의 영역입니다.



# 2

최근에 야구 게시판에서 이병규 선수를 둘러싸고, 약간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기록과 숫자로 말할 수 없는 이병규 선수의 소중함을 주장하셨던 LG팬 여러분, 그리고 분명 기록으로 볼 때는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소위 '세이버메트리션' 분들. 그 논의는 결국 아날로그 Vs 디지털 야구관, 전통적 가치의 오류와 기록의 맹신이라는 다양한 논점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많은 분들께, 저 역시 '세이버쟁이' 가운데 한 명이겠지만, 제가 야구에 대해 공부하고자 하는 영역에 세이버메트릭스 역시 속해 있을 뿐, 그리고 제가 가장 가시적으로 여러분께 보여드릴 수 있는 영역이기에 자주 포스팅을 할 뿐, 저는 숫자를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해본 결과, 숫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이제 알게 된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숫자라는 게, 또 통계라는 게, 그래서 기록이라는 게 얼마나 '연모의 영역'을 짓밟는 존재인지도 눈치 채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기록은 이병규 선수를 향해서 LG팬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셨던 '연모의 영역‘을 짓밟습니다. 왜 우리한테는 최고의 선수인데, 기록은 그렇게 나올까. 이병규가 못한다고? 너무 기록만 믿는 거 아냐?

하지만, 자주 말씀드린 대로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쟁이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숫자를 이용할 뿐입니다. 그리고 숫자와 비키니 수영복은 '아주 많이' 보여주지만,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나안(裸眼)보다, 우리의 기억보다는 훨씬 정밀하고 자세하게,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보여준다고, 저는 믿습니다. '연모의 영역‘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 3

세이버매트리션들께서 이병규의 가치를 평가한 대표적인 메트릭은 OPS였습니다. 아주 단순히 장타율과 출루율의 합으로 구할 수 있는 OPS. 미국의 세이머메트리션들은 OPS를 흔히 Quick-n-Dirty 메트릭이라 부릅니다. 단순한 계산법으로 말미암아 아주 빠르게 계산할 수 있지만, 그 정확도/신뢰도를 보장할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young026님께서 어느 코멘트에 언급하셨던 것처럼, 간략하지만 기본적으로 공격 지표가 갖춰야 할 요소들은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숫자'입니다.

이병규 선수의 2005 시즌 OPS는 .843으로 규정 타석을 채운 선수 가운데 12위, 같은 포지션인 중견수 가운데서는 3위권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병규 선수가 이번 시즌 12번째로 잘한 타자야, 하고 말씀드린다면 LG팬 여러분들께서 반박하실 게 틀림없습니다. 사실 OPS는 장타율이 과대평가되는 지표이기 때문에 잠실을 홈으로 쓰는 타자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잠실이란 리그 평균에 비해 전체 타석에서 줄어든 홈런이 90개에 달하는 구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위 '생산력'을 측정하는 그 어떤 지표로 봐도 이병규 선수의 순위는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모두 리그 5걸 안에는 들지 못하고, 포지션 내 순위도 엇비슷합니다. 물론 LG 팬 여려분들은 이병규 선수의 수비를 봤느냐고, 수비에서 극복하는 면이 많을 것이라고 주장하실 겁니다. (이는 현재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스탯이 제아무리 정교하다 하더라도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될 게 뻔합니다.) 물론 도루 이외의 주루 혹은 주루 센스에 대한 언급도 분명 나오리라 봅니다. 이제껏 나왔으니 또 나오겠죠. ^^; 그리고 사실 그런 주장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난 번에 陸遜 님께서 언급하셨던 대로, MLB의 사례를 통해 연구해 본 결과 아주 발이 빠른 혹은 센스 있는 타자라고 해도, 도루로 기록된 것 이외에 겨우 14베이스를 더 전진할 뿐입니다. 이를 점수로 환산하면 5.2점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한, 각 포지션에 대한 가중치가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이 있기는 하지만, 빌 제임스 Win Shares에 따르면 이번 시즌 수비에서 가장 많은 팀 승리에 공헌한 중견수는 필리스로 트레이드 된 애런 로원드, 그의 필딩 WS는 7.6입니다. 반면 이번 시즌 내내 양키스가 중견수 문제로 골머리를 썩게 만든 장본인 버니 윌리엄스의 필딩 WS는 2.3이었습니다. 이 정도 차이는 공격력으로 충분히 상쇄할 만한 수준입니다. (당연히 외야 수비가 전혀 안 되는 선수를 중견수로 쓸 리는 없다는 가정이 전제된 상태입니다.)

물론 MLB에서 끌어온 이 스탯들은 구장 효과를 반영한 스탯입니다. 이들이 쓰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구장 효과를 구했을 때, 이병규 선수보다 나은 '숫자'를 찍은 박재홍 선수의 홈구장 '문학구장'이 투수들에게 훨씬 유리한 구장이고, 따라서 박재홍 선수는 그만큼 더 가산점을 받아야 합니다. 안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2005 시즌 타자에게 가장 유리한 구장은 광주 구장이었고, 2번째로 타자에게 유리한 구장은 LG가 홈으로 쓸 때 잠실구장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장 효과를 감안하자면, 이병규 선수는 더 손해를 보게 됩니다.


# 4

그렇기 때문에, 구장 효과를 반영하지 않고 계산하는 것이, 이번 시즌 이병규 선수를 옹호하는 데 있어 좀더 유리한 방식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이병규 선수는 어떤 타자였는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1) 이병규 선수의 수비/주루 능력은 전혀 고려하지 않겠습니다. 순수하게 타자로서의 능력치만을 알아보는 작업입니다. 2) 구장 효과 역시 따지지 않겠습니다.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잠실구장은 다른 구장에 비해 안타 발생률 역시 높여주는 구장입니다. 이병규 선수가 가진 최고의 비교 우위 능력, 안타 생산 말입니다.


- 1. 이병규는 때린다.

다음 그래프는 공을 인 플레이시킨, 그러니까 공을 때린 비율을 보여주는 그래프입니다.



확실히 이병규 선수는 공을 기다리지 않고, 때립니다. 공을 인플레이 시키는 걸 상당히 좋아하는 타자입니다. 이는 알려진 대로입니다. 하지만 알려진 만큼은 아닙니다.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 가운데 전체 11위 수준입니다. 그러나 이는 비율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비율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전체 타구수를 알아보면, 413개로 4위가 됩니다. 1위 박한이 선수(432)와는 19개의 차이를 보입니다. 타석수 차이가 31개가 나지만, 박한이 선수의 컨택 비율이 더 높기 때문에 극복할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그래도 확실히 이병규 선수를 치는 걸 좋아하는 타자입니다.


- 2. 이병규는 안타를 만든다.

이병규는 이번 시즌 최다 안타(157)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공을 때리는 게 그에게는 확실히 유리한 선택이었다는 뜻입니다. 다음은 소위 BABIP를 나타낸 그래프입니다.



이번 시즌 이병규 선수는 .375의 BABIP를 기록, 리그 1위를 차지했습니다. BABIP란 볼이 인플레이 됐을 때 안타로 연결되는 비율을 나타내주는 수치입니다. 이는 미국 세이버쟁이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라인 드라이브 타구를 생산해 내는 능력과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텍사스리거 등의 행운도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에게는 타구의 성질에 관한 자료가 존재하지 않아, 운과 실력 사이의 관계를 확인할 수 없지만 많은 팬들께서 직접 목격하셨던 광경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 3. 이병규는 타율이 높다.

다음은 이번 시즌 이병규 선수의 타율 변화를 보여주는 그래프입니다.


안타만 많다고 타율이 높은 건 결코 아닙니다. 타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안타수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타수를 줄이는 것 역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안타 이외의 출루 수단, 대표적으로 볼넷 등을 얻어내는 게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병규 선수가 볼넷으로 걸어나간 경우는 전체 타석의 6.4%밖에 안 됩니다. 이는 규정 타석을 채운 43명의 타자 가운데 37위 수준입니다. 확실히 볼넷과는 인연이 멉니다.


- 4. 이병규는 참을성이 부족하다.

물론, 타자의 참을성이라는 게 그리 간단히 정의되는 개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정의하자면, 원하는 공이 올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가 원하는 공을 때려내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볼 카운트에 따라 우회적으로 투구수에 따른 타율을 알아 보면 ; .452 - .393 - .340 - .326 - .219 - .324로 나타납니다. 풀카운트 상황에서의 특수성을 제외하면, 공을 많이 볼수록 타율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그러니까 원하는 공을 노린다기보다, 다시 말해 게스 히팅을 한다기보다 자신의 동물적인 감각, 즉 운동 신경에 의한 타격을 하는 타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알고 계신 대로라고 봅니다.


- 5. 이병규는 때리면, 안타다.

그럼에도 혹은 그래서 타율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 비결은 다름 아닌 높은 BABIP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병규 선수에게는 때리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는 뜻입니다.



이번 시즌 전체 타자들의 BABIP와 타율 '변화'의 상관관계를 알아본 R²값은 .6435, 이병규 선수의 경우엔 .9681에 달합니다. 실제로 -2와 -3의 그래프를 보시면, 매우 유사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안타를 만들어 내는 걸 너무도 즐기고, 그것으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 6. 이병규는 스프레이 히터다.

이병규 선수의 타구 방향을 비율별로 알아보면, 좌 41%, 중 19%, 우 40%로 양쪽 구석으로 고르게 공을 날렸습니다. 이를 좀더 세분해 그래프로 그려보면 ;


좌타자이면서도 좌측으로 타구를 더 많이 날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밀어치기에 주력했다는 반증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또한 우중간으로 날아가는 타구 역시 평균 이상입니다. 이 코스가 어떤 코스인지 아시는 분은 아시리라 믿겠습니다.

실제로 타구의 분포 비율을 표준 편차를 이용해 확인해 봤을 때, 200개 이상의 타구를 날린 선수 가운데 이병규 선수보다 고른 분포를 보인 좌타자는 이용규, 박용택 선수뿐입니다. 게다가 밀어치기 능력, 즉 좌측 타구를 날린 비율만 보자면 그 어느 선수도 이병규 선수를 따라오지 못합니다.



7. 잠실에서 최고 타자는 이병규다.

이런 타격 성향은 사실 잠실에서 굉장히 유리한 조건입니다. 외야가 넓다는 건 그만큼 공을 떨어뜨릴 지점이 많아진다는 뜻이고, 강한 타구를 날릴 수 있다는 건 안타를 많이 만들어내는 게 유리하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큰 거 한방이 승부를 가를 확률이 적은 구장이라는 점을 고려하자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실제로 타격 라인을 확인해 보면 ;


이렇게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다른 선수가 돼 버립니다. 가장 큰 차이는 역시 BABIP입니다. 잠실에서 .402에 이르던 BABIP가 다른 구장에서는 .333으로 69포인트 또는 17%나 감소합니다. 그만큼 그는 잠실에 특화돼 있다는 뜻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우시다면, 타율이 .069 떨어졌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공격이라는 건 다른 게 아닙니다. 득점을 많이 창출해 낼수록 훌륭한 타자입니다. 아닙니까? 잠실에서 이병규 선수가 기록한 RSAA +23이라는 수치는 같은 아웃 카운트를 소비한 다른 타자들에 비해 23점이나 더 생산해 냈다는 뜻입니다.

잠실이 홈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이는 수원에서 서튼 선수가 기록한 RSAA +39점에 이은 최고 기록입니다. 수원 구장은 득점이 늘어나는 구장이고, 잠실은 두산과 엘지를 합치면, 전체적으로 득점이 줄어드는 구장입니다. 따라서 이 차이는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현대 팬이라 밝히자면, 물론 그래도 서튼 선수의 우위입니다!) 하지만 구장 효과는 이병규 선수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 5

이번 파울볼 드래프트에서 두산 팬들은 주저하지 않고 이병규 선수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석에서 만난 두산 팬들께서 말씀하십니다. 정말 1점 내주고 시작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말입니다. 두산과의 경기에서 이병규 선수가 기록한 RCAA는 +21로 그 어느 선수보다 뛰어납니다. 체감한 것이 기록으로 나타나고, 기록으로 드러난 것을 체감한 셈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체감의 기회는 일반적으로 매우 제한돼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응원팀의 홈구장을 찾게 마련이고, 응원팀이 방문하는 구장만 찾는 게 보통입니다. TV 중계 시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같은 양을 본다고 해도, 그 집중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자기 팀의 최고 선수가 리그 최고라는 착각 아닌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이는 위에서 언급했던 '연모의 영역'에 속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지난번에도 언급했듯, 그래서 숫자가 필요합니다. 자기가 최고라고 믿는 선수가 최고가 아님을 받아들일 용기를 위해서 말입니다. 이병규 선수는 LG 팬 여러분께 최고입니다. 잠실에서도 최고입니다. 앞의 것은 LG팬 여러분께서 가지고 계신 '연모의 영역'에 속하고, 뒤엣것은 연모의 영역뿐 아니라 '숫자의 영역'에도 존재하는 일입니다. 숫자의 영역은 '연모의 영역'을 증명할 수 있지만, '연모의 영역'은 숫자의 영역을 자꾸만 배척하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믿고 싶어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 6

이병규는 최고 타자입니다. 확실히 잠실에서는 그렇습니다. 두산과의 상대 경기에서도 확실히 그랬습니다. 하지만 다른 구장, 다른 상대팀과의 경기에서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팀 팬들이 보시기엔 충분히 아닐 수 있습니다. 아니라는 게 아니라 아닐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수원 구장에서 주로 야구를 보는 제가 서튼에 열광하고, 한화 팬 여러분께서 데이비스, 김태균에 열광하십니다. 저는 데이비스, 김태균이 잘한다는 건 알지만 MVP급이라고는 솔직히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서튼의 홈경기 스탯을 찾아보고 왜 그랬는지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사실 '연모의 영역'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입니다. 위에서도 썼듯 그곳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고, 침범하려 해서도 안되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보여줄 때는 더더욱 조심스러워져야 합니다. 숫자 몇 개 가지고 남들을 가르치려 든다고 불쾌해 하실 분들, 그럼 먼저, 여러분께 여러분께 자기 팀의 프랜차이즈가 최고이듯, 다른 팬들께는 다른 선수가 최고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시길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 마음 속 '연모의 영역'이 침범 받고 싶으신 것처럼, 저 역시, 그리고 다른 분들 역시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LG팬 여러분 가운데, 후반기 베스트를 뽑을 때 서튼을 빼고 이병규 선수 넣어달라는 분들 많으셨습니다. 코멘트로, 또 쪽지로 말씀 전해주신 분들 말입니다. 일일이 아무 언급도 안했지만, 그럼 여러분도 서튼 대신 이병규 선수가 들어간 글 올리시면 됩니다, 하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러시면 될 일입니다. 저 역시 늘 객관적이고 싶지만, 적어도 파울볼에 올리는 글에서만큼은 그러고 싶지만, 사람인지라 안 됩니다. 그리고 제가 '믿는' 객관적인 기준이 쳐지는 선수 때문에 그보다 훨씬 월등한, 게다가 우리 팀인 선수를 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 7

그래서 묻습니다. 그렇게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연모의 영역'이 충돌할 때, 비교하길 너무나 사랑하고, 순위 매기길 미치도록 좋아하는 야구팬의 본능이 꿈틀거릴 때 여러분께서 생각하시는 최고의 '툴‘은 무엇입니까? 저는 안타깝게도 아직 이것밖에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슬펐습니다. 김경기 선수가 제가 생각했던 것만큼 대단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김경기 선수에 대한 제 열정, 믿음, 사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연모의 영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좀 못하면 어떻습니까. 최고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내가 믿고, 사랑하고, 내게 가장 절대적인 선수였는데 말입니다.

숫자가 무어라 말을 하든, 제 ‘연모의 영역’은 확실하고 굳건한데 말입니다. 하지만 만약, 옛 선수들로 이러진 판타지 리그가 있다면, 좀더 심하게 거기 돈이 걸렸다면, 저는 김경기 선수 대신 이만수 선수나 김봉연 선수를 뽑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숫자의 영역'이 맡아야 할 역할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혼자 속으로, 갈릴레오처럼 외칠 겁니다. 그래도 최고 선수는 김경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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