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는 야구를 즐기는 혹은 사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직접 그라운드에서 땀 흘려 뛰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팬으로서 야구를 즐기고 사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구장을 찾아 목청껏 소리 높여 팀과 선수를 응원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실제로 저도 그런 순간에, 제가 정말 야구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또 야구를 즐기고 있다고 믿습니다. 정말 그대로 세상이 멈췄으면 하고 느끼는 혹은 아, 빨리 이 순간을 벗어났으면 하는 그 느낌이 직접 피부에 와닿기 때문입니다. 그라운드에 있는 선수들과, 그리고 같은 팀을 응원했던 팬들과 모두 하나가 되는 그 기분.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집에서 혼자 TV 중계로 야구를 보는 게 더 낫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엑셀 양과 함께 야구 경기를 뜯어보고는 합니다. 전자의 까닭은 제 눈이 구장에서 카메라가잡아주는 것만큼 정확하게 필드 안에서의 플레이 하나 하나를 세세히 잡아내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후자의 까닭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혹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엑셀 양으로 대변되는, 말하자면 기록이라는 세계를 통해 반영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하는 말대로, 저는 나안(裸眼)으로는 BA .300를 치는 타자와 .290타자를 구분할 줄 모릅니다. 한 선수의 타율이 .300에서 .290으로 떨어졌을 때, 타격 밸런스가 무너졌다든지 몸쪽 코스에 약한 성향이 상대방에게 간파됐다든지, 하는 말씀들이 곧잘 들리고는 합니다.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종류의 눈(目)을 통해 볼 때, 분명 제게도 그런 게 보이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제 눈을 믿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통계를 좇습니다.
#2
파울볼이야 가입한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하고 있지만, 눈팅하던 시절의 파울볼을 포함 대개의 야구 및 MLB 관련 사이트들은 시간 날 때마다 들러서 밀린 글들을 한꺼번에 읽는 스타일입니다. (엠바다도 매일 가요 ^^;) 그리고 우연히 파울볼에 글을 올리게 되기는 했지만, 그 전까지는 이미 가입돼 있는 사이트에서도 오직 눈팅만 했을 뿐 게시물을 올린 적도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차마, 글을 올릴 엄두가 안 났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사무실에 가면, 파울볼 야구 게시판에 글을 올리시는 분들의 내공을 칭송(稱訟)!!하는 파일이 하나 저장 돼 있습니다. 언제 올려야지 올려야지 하다가 미뤄두고 있었는데, 여기 게시판에서도 정말 깊은 내공을 소유하신 분들을 글을 읽다가 충격을 받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 정말 이렇게도 야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계시는구나, 싶은 그런 청량한 충격 말입니다.
그런데도 감히, 여기 글을 올릴 수 있었던 까닭은, 말 그대로 틀려도 좋다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실수를 범한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따끔한 충고도 해주시고, 또 격려도 해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저도 조금이나마 야구에 대해서 더 알아가게 된다는 사실에 설렐 수 있기에 감히 글을 올릴 용기가 생깁니다. 최소한 늘 겸허한 마음으로 여러분들의 지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말 이 야구란 놈에 대해, 너무도 많이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3
『Fever Pitch』에 그런 대사가 나옵니다. 7살 때부터 좋아한 걸 지금껏 좋아하는 게 뭐가 있냐고. 사실 이 대사가 정말 좋았던 건, 제가 남들에게 자주 밝히는 야구를 사랑하는 까닭과 무척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도 무엇인가를 이렇게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사실 저 꽤나 변덕쟁이입니다.
그런지에 미쳤을 땐, 너바나 싱글 한 장씩 사 모으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정말 서울 시내 레코드 가게를 다 뒤져서라도 구해 놓지 않으면 밤잠을 못잘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속에서 그런지가 빠져 나가자 이젠 그런 밴드도 있었지 싶습니다. 사진에 미쳤을 땐, 어디 사진 찍기 좋다하면 조금의 망설임 없이 무작정 떠나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진이 제 마음에서 빠져 나갔을 때, 걱정된 건 구멍난 출석점수였습니다. 다큐멘터리가 제 가슴에 찾아왔을 땐, 엑셀 양 대신 프리미어 군과 숱한 담배를 끼고 살았습니다. 캠코터 하나 들고 무작정 아무거나 되는 대로 괜히 기록하며 다녔습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가 제 가슴을 떠나고 나서, 지가베르토프의 이름을 듣고 어쩐지 아는 사람 같네, 희한하네, 하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야구만은 계속 제 마음에서 떠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늘 야구를 왜 좋아하냐는 질문에 똑같이 답했습니다. 나 정말 변덕 심한 거 알지? 그런데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단 한번도 안 싫어진 게 야구야. 그래서 내가 왜 이걸 좋아할까, 내가 더 궁금해. 사실은 그래서 야구를 좋아하나봐. 정말 이게 정답입니다. 사진에 빠졌을 때 만났던 여자친구는 매일 녹색 그라운드만 찍는 제 모습에 놀라 떠나 버렸습니다. 그런지에 미쳤을 땐, 공연 보다 말고, 경기 결과 확인하는 제 모습에 기겁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다큐멘터리에 미쳤을 때 만났던 여자친구는, 야구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인터뷰 따고 있는 제 모습이 징글징글하다며 떠나 버렸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야구는 곁에 있으니까요. 해마다 봄이면, 늘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나 주었으니까요.
그렇게 야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된 이후, 정말 여자친구보다 야구가 더 좋다는 사실을 느끼며 살게 된 이후, 저는 야구를 이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 도대체 이 녀석이 뭐가 이렇게 좋을까, 도대체 이 놈은 어떤 놈이길래 이렇게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걸까. 오른쪽 무릎을 다쳤을 때, 한국 시리즈에서 노히트 노런하겠다는 꿈이 날아가 버렸을 때, 그때 왜 함께 날아가 버리지 않은 걸까. 왜 그러고도 난 저 마운드를 보고도 마음이 아프지 않은 걸까. 왜 이 녀석은 내 곁을 떠나지 않을까.
#4
처음에는 책을 찾아 읽었습니다. 『야구란 무엇인가』, 『The Hidden Game of Baseball』, 『Moneyball』. 그리고 미국 언론 사이트들에 올라온 칼럼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팬 포럼을 뒤지게 됐고, 저 두 권을 책을 읽고 나서는 세이버쟁이들 블로그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陸遜 님께서도 자주 가신다는 <The Hardball Times> 같은 사이트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제게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눈으로 보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는 미약한 기운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전에 각종 텔넷 야구 동호회에서 글을 읽고 놀 때, 득점 창조력이라는 개념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기억이 납니다. 공부를 하면서 그 득점 창조력이 RC라는 걸 알게 됐고, 그것이 야구라는 경기의 아주 기본적인 원리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기록이라는 것도 확인하게 됐습니다.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야구의 기본 원리가 달라지지 않는 이상, 제가 눈으로 보고 즐기고 느끼고 기뻐하는 것과는 별도로, 야구를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여전히 그쪽 방면으로 공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구를 이해하기 위해 여전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알면 알수록 너무도 매력적이고, 그러면서도 난해함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기에, 묘한 학습 쾌감이 밀려드는, 사실 매우 유쾌한 작업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사랑하는, 야구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사이버대학 수업을 듣게 됐고, 통계로 이뤄진 그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통계학 수업을 잡다하게 많이 들었습니다. 통계를 위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의 필요성을 느껴 오라클까지 배우려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커리큘럼에 개설된 강좌가 오라클뿐이더군요 ^^;) 정말이지, 제게 지금껏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애정을 심어준 녀석이라면, 이 정도 투자는 아깝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정말이지, 하나도 빼먹지 않고 야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싶습니다.
# 5
가끔 황송스럽게도, '존경합니다.' 같은 코멘트를 남겨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황송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하는 작업이라야,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남을 가르치는 과정이 아니라, 제가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어디선가 고수님들이 코웃음 치고 계실 테지만, 외국에서 세이버쟁이들이라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툴을 가지고 그저 국내 리그에도 그게 맞아 떨어지나 혼자 확인해 보는 과정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주로 관심을 기울이는 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점들이 실제로 그러한가 하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DIPS는 상당히 논란의 소지가 많은 접근법입니다. 인 플레이 된 볼이 안타가 되는 건 투수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투수가 올라와서 쭉쭉 뻗어 나가는 타구를 연거푸 맞습니다. 하지만 운 좋게도 그 공들이 모두 야수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런데도 과연 그게 투수의 잘못이 아닐까요? 오히려 운이 좋아서 안타를 맞지 않은 게 아닐까요? 제가 감독이라면 교체를 심각하게 고려해 볼 것 같습니다.
이런 게 사실 기록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투수의 구질에 따라 타구의 성질이 달라지게 됩니다. 땅볼 투수와 플라이 볼 투수라는 낱말 자체가 그럼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해 대한 오해의 소산을 가끔씩 확인하게 됩니다. 심지어 국내의 모 사이트에서 ‘잘 맞은 타구가 안타가 될 확률보다 그렇지 않게 될 확률이 높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하고 쓰신 문장 역시 본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잘 맞은 타구가 안타로 연결 될 확률이 그렇지 않게 될 확률보다 높다면, 예전에 어떤 구단 고위층 인사의 발언대로, 타자들은 내야수와 외야수 사이에 공을 떨어뜨리는 방식의 타격 연습을 해야 하지,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타구를 강하게 때리는 타격 연습을 지속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와 같은 타격 연습법이 비단, 많은 홈런을 양산하기 위한 방법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타격 연습이 어떤 효과를 유발한다는 것도 틀림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MLB쪽 통계에 의하면, 라인 드라이브 타구가 아웃으로 연결될 확률은 25%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면 땅볼은 72%에 이르고, 외야 플라이는 75%, 내야 플라이는 97%에 달합니다. 역으로 잘 맞은 라인 드라이브 타구는 75%나 안타가 됩니다. 따라서 어떤 투수가 라인 드라이브로 맞아 나가는 타구를 많이 얻어맞는다면, 당연히 안타도 더 많이 허용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인 플레이 된 타구에 대해 투수의 잘못이 없다는 주장의 설득력은 약화되고 맙니다.
제가 이를 통해 말씀드리고 싶은 사실은 1) 세이버 툴 자체가 진화한다는 사실입니다. DIPS가 2.0 버전이 나왔을 때 추가된 사실은 좌완 투수, 그리고 너클볼러의 경우 피안타율에 있어 보통의 우완 투수와 차이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업그레이드 버전에 대한 최근의 논의를 읽어 보면,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타구의 성질과 연관짓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2) 기록 자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해석이 저마다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때로 그저 ‘다를’ 수도 있지만, 때로는 ‘틀릴’ 수도 있습니다.
#6
제 말씀이 언제나 맞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당연히 저도 틀립니다. 그것도 제법 자주 그렇습니다. 예전에 써 놓은 글들을 제가 읽어 보면, 저조차 당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오히려 작은 위안이 듭니다. 그 잘못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됐다는, 야구에 대해 좀더 이해하게 됐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여러분들의 도움이 가장 컸습니다. 나쁜 기억력 탓으로 차마 빠뜨리지 말아야 할 분의 닉네임을 빼먹을까 두렵긴 하지만, young026님의 엄청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예리함, 陸遜 님의 레드삭스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번뜩이는 글솜씨, 高校 올스타님의 폭 넓고 깊은 관심, 에이스 남우식 님의 기가 찰 정도의 정보력, 그리고 누구보다 제가 공부하는 데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별님의 세심한 꼼꼼함, 마지막으로, 하지만 절대 그 가치가 마지막은 아닌, (영어로 At Last but not at least 그겁니다. ^^;) 여러분들께서 써주시는 코멘트 그리고 추천이 제겐 정말 큰 힘이 됩니다.
그러니까 부족하다는 게 제겐 가장 큰 자랑거리입니다. 틀려도 좋다는 것, 그걸 통해 배울 수 있다는 것. 야구를 이해하는 시행착오로서의 또 다른 사랑.
세이버가 언제나 맞습니까? 아닙니다. 슈렉의 클러치 히팅을 세이버가 부정한다고, 어찌 제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기록이 모든 걸 말해줍니까? 제 가슴 속에 최고의 영웅은 프로 경력 동안 단 한번도 3할을 때려 보지 못한 김경기 선수입니다.
절대 이런 것들로 야구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야구를 이해할 수는 있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아마 녀석은 부족하다고 느끼겠지만, 저는 정말 최선을 다해 야구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또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을 다해 야구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야구를 즐기는 혹은 사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직접 그라운드에서 땀 흘려 뛰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팬으로서 야구를 즐기고 사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구장을 찾아 목청껏 소리 높여 팀과 선수를 응원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실제로 저도 그런 순간에, 제가 정말 야구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또 야구를 즐기고 있다고 믿습니다. 정말 그대로 세상이 멈췄으면 하고 느끼는 혹은 아, 빨리 이 순간을 벗어났으면 하는 그 느낌이 직접 피부에 와닿기 때문입니다. 그라운드에 있는 선수들과, 그리고 같은 팀을 응원했던 팬들과 모두 하나가 되는 그 기분.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집에서 혼자 TV 중계로 야구를 보는 게 더 낫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엑셀 양과 함께 야구 경기를 뜯어보고는 합니다. 전자의 까닭은 제 눈이 구장에서 카메라가잡아주는 것만큼 정확하게 필드 안에서의 플레이 하나 하나를 세세히 잡아내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후자의 까닭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혹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엑셀 양으로 대변되는, 말하자면 기록이라는 세계를 통해 반영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하는 말대로, 저는 나안(裸眼)으로는 BA .300를 치는 타자와 .290타자를 구분할 줄 모릅니다. 한 선수의 타율이 .300에서 .290으로 떨어졌을 때, 타격 밸런스가 무너졌다든지 몸쪽 코스에 약한 성향이 상대방에게 간파됐다든지, 하는 말씀들이 곧잘 들리고는 합니다.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종류의 눈(目)을 통해 볼 때, 분명 제게도 그런 게 보이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제 눈을 믿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통계를 좇습니다.
#2
파울볼이야 가입한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하고 있지만, 눈팅하던 시절의 파울볼을 포함 대개의 야구 및 MLB 관련 사이트들은 시간 날 때마다 들러서 밀린 글들을 한꺼번에 읽는 스타일입니다. (엠바다도 매일 가요 ^^;) 그리고 우연히 파울볼에 글을 올리게 되기는 했지만, 그 전까지는 이미 가입돼 있는 사이트에서도 오직 눈팅만 했을 뿐 게시물을 올린 적도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차마, 글을 올릴 엄두가 안 났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사무실에 가면, 파울볼 야구 게시판에 글을 올리시는 분들의 내공을 칭송(稱訟)!!하는 파일이 하나 저장 돼 있습니다. 언제 올려야지 올려야지 하다가 미뤄두고 있었는데, 여기 게시판에서도 정말 깊은 내공을 소유하신 분들을 글을 읽다가 충격을 받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 정말 이렇게도 야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계시는구나, 싶은 그런 청량한 충격 말입니다.
그런데도 감히, 여기 글을 올릴 수 있었던 까닭은, 말 그대로 틀려도 좋다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실수를 범한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따끔한 충고도 해주시고, 또 격려도 해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저도 조금이나마 야구에 대해서 더 알아가게 된다는 사실에 설렐 수 있기에 감히 글을 올릴 용기가 생깁니다. 최소한 늘 겸허한 마음으로 여러분들의 지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말 이 야구란 놈에 대해, 너무도 많이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3
『Fever Pitch』에 그런 대사가 나옵니다. 7살 때부터 좋아한 걸 지금껏 좋아하는 게 뭐가 있냐고. 사실 이 대사가 정말 좋았던 건, 제가 남들에게 자주 밝히는 야구를 사랑하는 까닭과 무척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도 무엇인가를 이렇게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사실 저 꽤나 변덕쟁이입니다.
그런지에 미쳤을 땐, 너바나 싱글 한 장씩 사 모으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정말 서울 시내 레코드 가게를 다 뒤져서라도 구해 놓지 않으면 밤잠을 못잘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속에서 그런지가 빠져 나가자 이젠 그런 밴드도 있었지 싶습니다. 사진에 미쳤을 땐, 어디 사진 찍기 좋다하면 조금의 망설임 없이 무작정 떠나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진이 제 마음에서 빠져 나갔을 때, 걱정된 건 구멍난 출석점수였습니다. 다큐멘터리가 제 가슴에 찾아왔을 땐, 엑셀 양 대신 프리미어 군과 숱한 담배를 끼고 살았습니다. 캠코터 하나 들고 무작정 아무거나 되는 대로 괜히 기록하며 다녔습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가 제 가슴을 떠나고 나서, 지가베르토프의 이름을 듣고 어쩐지 아는 사람 같네, 희한하네, 하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야구만은 계속 제 마음에서 떠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늘 야구를 왜 좋아하냐는 질문에 똑같이 답했습니다. 나 정말 변덕 심한 거 알지? 그런데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단 한번도 안 싫어진 게 야구야. 그래서 내가 왜 이걸 좋아할까, 내가 더 궁금해. 사실은 그래서 야구를 좋아하나봐. 정말 이게 정답입니다. 사진에 빠졌을 때 만났던 여자친구는 매일 녹색 그라운드만 찍는 제 모습에 놀라 떠나 버렸습니다. 그런지에 미쳤을 땐, 공연 보다 말고, 경기 결과 확인하는 제 모습에 기겁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다큐멘터리에 미쳤을 때 만났던 여자친구는, 야구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인터뷰 따고 있는 제 모습이 징글징글하다며 떠나 버렸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야구는 곁에 있으니까요. 해마다 봄이면, 늘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나 주었으니까요.
그렇게 야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된 이후, 정말 여자친구보다 야구가 더 좋다는 사실을 느끼며 살게 된 이후, 저는 야구를 이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 도대체 이 녀석이 뭐가 이렇게 좋을까, 도대체 이 놈은 어떤 놈이길래 이렇게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걸까. 오른쪽 무릎을 다쳤을 때, 한국 시리즈에서 노히트 노런하겠다는 꿈이 날아가 버렸을 때, 그때 왜 함께 날아가 버리지 않은 걸까. 왜 그러고도 난 저 마운드를 보고도 마음이 아프지 않은 걸까. 왜 이 녀석은 내 곁을 떠나지 않을까.
#4
처음에는 책을 찾아 읽었습니다. 『야구란 무엇인가』, 『The Hidden Game of Baseball』, 『Moneyball』. 그리고 미국 언론 사이트들에 올라온 칼럼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팬 포럼을 뒤지게 됐고, 저 두 권을 책을 읽고 나서는 세이버쟁이들 블로그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陸遜 님께서도 자주 가신다는 <The Hardball Times> 같은 사이트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제게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눈으로 보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는 미약한 기운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전에 각종 텔넷 야구 동호회에서 글을 읽고 놀 때, 득점 창조력이라는 개념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기억이 납니다. 공부를 하면서 그 득점 창조력이 RC라는 걸 알게 됐고, 그것이 야구라는 경기의 아주 기본적인 원리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기록이라는 것도 확인하게 됐습니다.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야구의 기본 원리가 달라지지 않는 이상, 제가 눈으로 보고 즐기고 느끼고 기뻐하는 것과는 별도로, 야구를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여전히 그쪽 방면으로 공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구를 이해하기 위해 여전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알면 알수록 너무도 매력적이고, 그러면서도 난해함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기에, 묘한 학습 쾌감이 밀려드는, 사실 매우 유쾌한 작업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사랑하는, 야구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사이버대학 수업을 듣게 됐고, 통계로 이뤄진 그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통계학 수업을 잡다하게 많이 들었습니다. 통계를 위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의 필요성을 느껴 오라클까지 배우려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커리큘럼에 개설된 강좌가 오라클뿐이더군요 ^^;) 정말이지, 제게 지금껏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애정을 심어준 녀석이라면, 이 정도 투자는 아깝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정말이지, 하나도 빼먹지 않고 야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싶습니다.
# 5
가끔 황송스럽게도, '존경합니다.' 같은 코멘트를 남겨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황송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하는 작업이라야,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남을 가르치는 과정이 아니라, 제가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어디선가 고수님들이 코웃음 치고 계실 테지만, 외국에서 세이버쟁이들이라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툴을 가지고 그저 국내 리그에도 그게 맞아 떨어지나 혼자 확인해 보는 과정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주로 관심을 기울이는 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점들이 실제로 그러한가 하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DIPS는 상당히 논란의 소지가 많은 접근법입니다. 인 플레이 된 볼이 안타가 되는 건 투수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투수가 올라와서 쭉쭉 뻗어 나가는 타구를 연거푸 맞습니다. 하지만 운 좋게도 그 공들이 모두 야수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런데도 과연 그게 투수의 잘못이 아닐까요? 오히려 운이 좋아서 안타를 맞지 않은 게 아닐까요? 제가 감독이라면 교체를 심각하게 고려해 볼 것 같습니다.
이런 게 사실 기록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투수의 구질에 따라 타구의 성질이 달라지게 됩니다. 땅볼 투수와 플라이 볼 투수라는 낱말 자체가 그럼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해 대한 오해의 소산을 가끔씩 확인하게 됩니다. 심지어 국내의 모 사이트에서 ‘잘 맞은 타구가 안타가 될 확률보다 그렇지 않게 될 확률이 높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하고 쓰신 문장 역시 본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잘 맞은 타구가 안타로 연결 될 확률이 그렇지 않게 될 확률보다 높다면, 예전에 어떤 구단 고위층 인사의 발언대로, 타자들은 내야수와 외야수 사이에 공을 떨어뜨리는 방식의 타격 연습을 해야 하지,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타구를 강하게 때리는 타격 연습을 지속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와 같은 타격 연습법이 비단, 많은 홈런을 양산하기 위한 방법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타격 연습이 어떤 효과를 유발한다는 것도 틀림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MLB쪽 통계에 의하면, 라인 드라이브 타구가 아웃으로 연결될 확률은 25%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면 땅볼은 72%에 이르고, 외야 플라이는 75%, 내야 플라이는 97%에 달합니다. 역으로 잘 맞은 라인 드라이브 타구는 75%나 안타가 됩니다. 따라서 어떤 투수가 라인 드라이브로 맞아 나가는 타구를 많이 얻어맞는다면, 당연히 안타도 더 많이 허용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인 플레이 된 타구에 대해 투수의 잘못이 없다는 주장의 설득력은 약화되고 맙니다.
제가 이를 통해 말씀드리고 싶은 사실은 1) 세이버 툴 자체가 진화한다는 사실입니다. DIPS가 2.0 버전이 나왔을 때 추가된 사실은 좌완 투수, 그리고 너클볼러의 경우 피안타율에 있어 보통의 우완 투수와 차이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업그레이드 버전에 대한 최근의 논의를 읽어 보면,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타구의 성질과 연관짓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2) 기록 자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해석이 저마다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때로 그저 ‘다를’ 수도 있지만, 때로는 ‘틀릴’ 수도 있습니다.
#6
제 말씀이 언제나 맞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당연히 저도 틀립니다. 그것도 제법 자주 그렇습니다. 예전에 써 놓은 글들을 제가 읽어 보면, 저조차 당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오히려 작은 위안이 듭니다. 그 잘못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됐다는, 야구에 대해 좀더 이해하게 됐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여러분들의 도움이 가장 컸습니다. 나쁜 기억력 탓으로 차마 빠뜨리지 말아야 할 분의 닉네임을 빼먹을까 두렵긴 하지만, young026님의 엄청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예리함, 陸遜 님의 레드삭스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번뜩이는 글솜씨, 高校 올스타님의 폭 넓고 깊은 관심, 에이스 남우식 님의 기가 찰 정도의 정보력, 그리고 누구보다 제가 공부하는 데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별님의 세심한 꼼꼼함, 마지막으로, 하지만 절대 그 가치가 마지막은 아닌, (영어로 At Last but not at least 그겁니다. ^^;) 여러분들께서 써주시는 코멘트 그리고 추천이 제겐 정말 큰 힘이 됩니다.
그러니까 부족하다는 게 제겐 가장 큰 자랑거리입니다. 틀려도 좋다는 것, 그걸 통해 배울 수 있다는 것. 야구를 이해하는 시행착오로서의 또 다른 사랑.
세이버가 언제나 맞습니까? 아닙니다. 슈렉의 클러치 히팅을 세이버가 부정한다고, 어찌 제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기록이 모든 걸 말해줍니까? 제 가슴 속에 최고의 영웅은 프로 경력 동안 단 한번도 3할을 때려 보지 못한 김경기 선수입니다.
절대 이런 것들로 야구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야구를 이해할 수는 있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아마 녀석은 부족하다고 느끼겠지만, 저는 정말 최선을 다해 야구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또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을 다해 야구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야구야, 정말 너무너무 고마워. 아니, 다른 이유는 말하지 않을래. 다른 분들도 너무 많이 말씀하셨을 테니까. 그냥, 내가 평생을 살면서 무언갈 이렇게 미치도록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런 사람이 되게 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네게 너무너무 고마워. 그리고 또 고마워. 덕분에 참 많은 것들을 알게 되어서. 꿈을 위해 흘리는 땀의 소중함, 내가 아닌 더 크고 넓은 무엇인가를 위해 내 모든 걸 바치는 헌신, 때로 미칠 듯이 빠져드는 열정, 그리고 수학을 끔찍이도 싫어했던 내가 그 복잡한 수식과 씨름하게 해준 것도. 그러니까 내가 정말 하기 싫은 일도 너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게끔 내게 큰 사랑과 감동을 주어서 말이야. 정말 너무 고마워. 너의 안에서 너를 통해 이루려던 나의 꿈은, 이제 영영 이룰 수 없게 됐지만, 그렇게 된지도 이젠 너무 오래 돼 버렸지만, 여전히 너의 곁에서 너를 통해 또 다른 내 꿈을 이루고 싶어. 야구야, 꼭 도와줄 거지? 여러분도 그래 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