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시대 전략가 손무는 '손자병법'에 용장(勇將) 위에 지장(智將), 지장 위에 덕장(德將), 덕장 위에 복장(福將)이라고 썼습니다.
새 시즌부터 현대캐피탈 사령탑에 앉게 된 필리프 블랑(64·프랑스) 감독은 확실히 복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배구 남자부 역사상 최고 공격수라고 할 수 있는 레오(34·쿠바)가 덩굴째 굴러 들어 왔으니 말입니다.
현대캐피탈은 11일(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열린 2024~2025시즌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 지명권을 얻어 레오를 지명했습니다.
일본 대표팀 지휘봉도 잡고 있는 블랑 감독은 이날 드래프트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블랑 감독을 대신해 레오를 호명한 파비오 스토르티(46·이탈리아) 코치는 " 한국에서 검증된 선수를 뽑자는 게 첫 번째 고려 사항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레오는 검증이 끝나도 애저녁에 끝난 선수입니다.
레오는 OK금융그룹에서 뛴 지난 시즌에도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로 뽑혔고 팀을 챔피언결정전 무대까지 이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기노 마사지(荻野正二·54) 감독은 "기술과 파이팅 그리고 스피릿이 좋고 (우리 팀이) 지향하는 배구에 더 적합한 선수가 있다"면서 레오와 재계약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이날 드래프트가 '레오 쟁탈전'으로 변했습니다.
다만 이날 1순위 지명권을 얻은 대한항공은 레오 대신 2020~2021시즌 손발을 맞췄던 요스바니(33)를 선택했습니다.
지난 시즌 삼성화재에서 뛰었던 요스바니 역시 재계약 불발로 트레이드 대상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순위 | 구단 | 이름 | 나이 | 국적 |
① | 대한항공 | 요스바니 | 33 | 쿠바 |
② | 현대캐피탈 | 레오 | 34 | 쿠바 |
③ | KB손해보험 | 비예나(재계약) | 31 | 스페인 |
④ | 한국전력 | 루이스 엘리안 에스트라다 | 24 | 쿠바 |
⑤ | 우리카드 | 마이클 아히 | 26 | 네덜란드 |
⑥ | 삼성화재 | 마테이 | 28 | 슬로베니아 |
⑦ | OK금융그룹 | 마누엘 루코니 | 25 | 이탈리아 |
이어 지명 기회를 얻어 현대캐피탈로서는 화룡점정(畵龍點睛) 기회가 찾아왔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현대캐피탈은 사실 2010년에도 레오를 영입하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레오는 당시 푸에르토리코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비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못했습니다.
이후 해외 진출 자격을 얻은 레오는 러시아 리그에 진출한 뒤 2012~2013시즌 임대 선수 신분으로 삼성화재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레오는 우리가 아는 그 레오가 됐습니다.
현대캐피탈은 베테랑 선수 A가 '쿠데타'를 일으켜 최태웅(48) 전 감독을 내쫓는 과정에서 어수선한 분위기로 지난 시즌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래도 결국 준플레이오프행 티켓을 따내면서 '절반의 성공'을 거뒀습니다.
허수봉(26)을 필두로 최 전 감독이 애지중지 키운 선수들이 건재한 덕분입니다.
게다가 키 204cm인 아시아 쿼터 선수 덩신펑(鄧忻朋·23·중국)이 합류하면서 상대 코트를 '고공 폭격'할 준비를 마친 상황.
여기에 레오까지 뽑았으니 이런 팀 지휘봉을 잡게 된 블랑 감독은 복장 중에서도 복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고 현대캐피탈도 문제가 전혀 없는 팀은 아닙니다.
레오 - 덩신펑 - 허수봉이 동시에 코트를 밟는다면 서브 리시브를 어떻게 할 것인지 전술이 필요합니다.
일단 허수봉이 지난 시즌 상대 전체 서브 가운데 29.3%를 받아내면서 리시브 효율 40.8%를 기록한 건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대각에 레오가 들어서는 건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레오는 포지션 자체는 아웃사이드 히터(옛 레프트)지만 리시브 점유율은 2013~2014시즌 삼성화재에서 남긴 12.1%가 개인 최고 기록인 선수입니다.
현대캐피탈은 또 OK금융그룹에서 곽명우(33)를 트레이드로 데려와 시즌 종료 후 국군체육부대(상무)에 입대한 김명관(27) 자리를 채운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곽명우 개인사로 이 트레이드가 결국 불발로 끝난 상황.
아무 움직임이 없다면 이현승(23)과 이준협(23)으로 시즌을 풀어가야 한다는데 제아무리 복장이라도 행운을 너무 많이 필요로 하는 선택입니다.
시즌 개막 후 황택의(28)가 돌아오는 KB손해보험이 트레이드 파트너가 될 수도 있습니다.
곽명우 트레이드 상대였던 차영석(30) 카드 역시 KB손해보험에 매력적인 '미끼'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용장이 되기로 한 오기노 감독이 어떤 성적표를 받게 될지도 새 시즌 관전 포인트가 될 겁니다.
사실 한국 프로배구 팀 지휘봉을 잡는 외국인 감독은 오기노 감독과 똑같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몰방(沒放) 배구'는 분명 '비정상'에 가까운 전술인데 V리그에서는 정말 잘 통하기 때문입니다.
오기노 감독으로서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최하위(7순위) 지명권을 얻는 데 그치면서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
결과적으로 오기노 감독은 레오를 마누엘 루코니(25·이탈리아)로 바꾼 채 실험에 나서게 됐습니다.
배구 팬 한 사람으로서 오기노 감독이 실험에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팀이 똑같은 배구를 추구하기보다 각 팀이 서로 다른 색깔로 용쟁호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굳이 레오를 포기하는 방법밖에 없었는지는 의문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레오는 확실히 몰방형 외국인 선수와는 또 다른 그냥 레오니까요.
이러니 V리그에서 몰방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