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제한이 없는 승부의 묘미를 알려주지." - 만화 H2 중 쿠니미 히로(国見比呂)의 대사야구라는 종목은 다른 구기 종목과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간과 득점 모두 제한이 없다는 점이다. 위에 인용한 대사 역시 스스로를 어깨 부상으로 착각해 축구부에 들어갔던 히로가 야구 애호회(愛好會)로 복귀하면서 내뱉은 말이다. 야구와 달리 축구는 시간제한을 기본 규칙으로 삼고 있는 종목이기 때문에 비교를 위해 저 대사를 사용한 것이다.
승부가 날 때까지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승부를 겨룬다는 건 사실 굉장히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2004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극적인 리버스 스윕도 작년 휴스턴의 18회 연장전 승리도 모두 시간 제한을 두지 않는 승부 정신에서 비롯된 명승부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설레임은 설레임일 뿐이다. 계속해서 기나긴 승부만 계속된다면 아무래도 재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미국, 일본 가릴 것 없이 프로 야구가 활성화 되어 있는 곳이라면 경기 시간 단축을 위해 다양한 규정을 마련해 두고 있다. 우리 리그 역시 각 팀 덕아웃에 소위 '스피드업 규정'이라는 경기 시간 단축 규정이 붙어 있다. 공수 교대 때에 선수들은 전력질주를 할 것, 이닝 교대시 준비 투구수는 3개 등 19 가지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이 규정을 준수하는 코치나 선수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유독 팬들이 지루함을 호소했던 이번 시즌에는 어땠을까? 2006시즌 프로야구의 경기당 평균 소요 시간은 3시간 10분 정도였다. '99 시즌 평균 3시간대를 통과한 이후 3시간 15분 정도의 기록을 보였으니 올해는 5분가량 단축된 셈이다. 팀 별 기록도 별반 차이가 없다. 경기 시간이 가장 길었던 SK는 평균보다 6분 긴 3시간 16분이었고, 가장 짧은 두산은 3시간 6분이었다. 전체적으로 경기 진행 시간에 있어서만큼은 크게 흠 잡을 데 없는 한 시즌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올해 유난히도 야구가 재미없다는 소리가 야구팬들로부터도 많이 쏟아졌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해답은 역시나 ‘투고타저'에 있었다. 타자들이 제대로 된 공격을 펼치지 못했기에 경기 시간이 짧아진 것이다. 나와야 할 타격이 나오지 못했으니 경기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한번 경기 시간대별 타격 성적을 알아보자.
일반적으로 타자들이 잘 때릴 때 타격 시간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물론 4시간 이상 경기가 늘어지는 경우에는 기록이 소폭 감소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기록 역시 3시간 이내로 경기가 끝날 때보다는 높은 성적이다. 아마도 경기 막판 타자들의 집중력 저하가 소폭의 타격 성적 하락을 불러왔다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이런 결론을 꺼내볼 수 있다. 재미있는 공격 야구와 경기 시간은 어떻게 보면 양면의 칼이라고 말이다. 대다수의 야구팬이 기대하는 화끈한 공격 야구는 경기 시간을 길어지게 만드는 문제점 역시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야구가 지루한 것은 경기 시간이 길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이 시간을 진지하고 짜릿한 승부로 가득 채울 수 있다면 야구 경기를 보고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수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홈런이 시원하게 밤하늘을 가르면서 엎치락뒤치락 치열한 승부가 계속해서 전개된다면 설사 4시간이 넘어가는 경기라고 해도 지루함을 느끼는 팬들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경기에 불필요한 시간을 줄이는 것만이 재미와 시간 단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야구에는 군더더기 동작이 너무 많다. 그래서 팬들이 야구를 지루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실제로 3시간 10분짜리 프로 야구 경기는 아래와 같이 구성돼 있다.
먼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인터벌 및 투구'부터 알아보자. 만약 경기당 270개의 투구를 투수들이 던진다고 할 때 우리 투수들은 평균 23초마다 공 하나씩을 던지는 셈이 된다. 물론 인터벌은 투수뿐 아니라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는 시간과도 관련이 깊은 문제다. 쓸데없이 타석을 벗어나는 타자를 보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간을 선수들이 5초씩만 줄여준다면 경기 시간은 20분이나 단축되게 된다.
공수 교대 역시 마찬가지다. '스피드 업 규정' 18항에는 '전 이닝의 마지막 아웃이 되는 순간부터 다음 이닝 첫번째 공이 투구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대 2분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현재는 2분 15초다. 이 규정에만 맞춰도 경기 시간을 5분을 줄일 수 있다. 15초는 분명 선수들이 조금만 서둘러준다면 충분히 줄일 수 있는 시간이다.
새로운 타자가 등장하는 시간은 어떨까? 대기 타석에서 배팅 장갑을 미리 점검하고, 타석에 조금만 서둘러 등장한다면 타석당 5초 정도는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만 되어도 경기 시간은 다시 5분이 줄어든다. 선수들이 아주 조금씩 서둘러줬을 뿐인데도 경기 시간은 무려 30분이나 줄어들었다. 그리고 선수들이 부지런히 움직여준 공수 교대와 타석 등장은 경기 내용 자체와도 크게 상관이 없는 일이다.
이미 20년도 더 된 '84년 9월호 '월간야구'에는 평균 경기 시간이 2시간 50분에 육박한다며 우려의 목소리가 담긴 기사가 실렸다. 2시간 30분 이내로 경기 시간이 줄어들지 못한다면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덧 우리는 3시간 10분대에 안심하는 안일함에 빠져 있다. 실제로 경기 시간을 얼마든지 줄일 수 있는 여지가 있음에도 아무런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투수가 5초만 빨리 던지고, 새로운 타자들이 타석에 5초만 빨리 들어서고, 공수 교대 때 조금만 부지런히 뛰어준다면 이미 프로 야구 경기는 2시간 40분대로 줄어든다. 만약 이 시간에 밀도 높은 프로 야구를 선보일 수 있다면 다시금 우리 프로야구는 분명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규칙도 정해져 있다. 실천이 되고 있지 않을 뿐이다. 선수들은 규칙을 따라야 하고, 규칙을 따르지 않는 선수가 코치에게는 심판이 분명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 쓸데없는 동작으로 팬들의 시간을 빼앗는 것 자체가 팬들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탱크' 박정태 코치는 올해 올스타전에서 오랜만에 만난 후배 '박기혁'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혁아, 프로는 유니폼 입고 걸어다는 것 아이다." 왜 박정태를 이토록 야구팬들이 여전히 그리워하는가. 해답은 바로 저 문장 안에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