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2007년 5월 10일자 조선일보 1면

13년 전(2007년) 오늘 조선일보는 강태영 당시 청와대 혁신관리비서관이 자기 딸을 서울체고에 부정편입시킨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면서 강 비서관이 수사 도중 사표를 냈다고 덧붙였습니다.

 

2006년 일반계고에 진학했던 강 비서관 딸은 2학기를 앞두고 '공기소총 사격 특기생'으로 서울체고 편입 시험에 합격해 학교를 옮겼습니다.

 

조선일보는 "사격 경험이 없는데도 편입을 위해 치르는 실기시험인 '전문기능검사'에서 '국가 대표' 수준의 점수를 기록한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강 전 비서관의 딸은 대회출전 경력도 없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얼핏 보면 '비리'라는 낱말이 떠올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 신문은 "경찰은 지난달 강 전 비서관에게 소환을 통보했으나, 부인이 대신 나와 조사를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강 전 비서관의 부인은 '딸이 사격 연습을 한 적은 없지만, 실기에서 높은 점수를 받게 된 경위는 모른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며 의혹을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2007년 5월 19일자 한겨레 26면

반전이 일어나는 데는 열흘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강 전 비서관 딸이 그달 18일 열린 경호실장기 사격대회 클레이 더블트랩에서 역대 여고부 최고 기록을 새로 쓴 겁니다.

 

딸은 40발씩 모두 120발을 쏘는 경기에서 110발을 명중시켰습니다. 

 

참고로 이 대회 여자 일반부 우승 기록이 104발이었고, 당시 한국 최고 기록이 111발이었습니다. 

 

이 딸 = 강지은(30)이 정말 사격 천재였던 겁니다.

 

2006 도하 아시아경기 금메달리스트 김미진(41)은 당시 "내가 첫 대회에서 76발을 쏜 것으로 기억하는데, 두번째 대회에서 110발을 맞추다니…"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합니다.

 

냉정하게 말해 사격대회 특히 여고부 경기라면 그때나 지금이나 신문 지면을 차지하기 힘든 게 사실.

 

그러나 한겨레는 아버지 이름까지 넣어서 이 대회 결과를 보도했습니다.

진선여중을 졸업한 뒤 은광여고로 진학한 강지은은 그해 7월 아버지 강태영(48) 씨와 우연히 태릉사격장을 찾았다가 클레이사격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공부는 아무리해도 늘지 않았는데, 사격은 쾌감이 너무 좋더라구요."

 

그리곤, 2학기부터 서울체고로 편입했고, 지난달 회장기 사격대회에서 99발로 1위에 오른 뒤 2번째 대회인 이날 우승함으로써 오는 11월 쿠웨이트 아시아선수권 태극마크를 일찌감치 예약했다.

 

물론 조선일보에서는 이 소식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정치의 것은 정치에게, 스포츠의 것은 스포츠에게'는 사실 정말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 출전 당시 강지은. 팔렘방=로이터 뉴스1

그래서 이 천재 사격 소녀는 어떻게 됐을까요?

 

국가대표 선수로 성장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 클레이사격 여자 트랩 은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무도 강지은이 누구 딸인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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