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쿠르트 지휘봉을 잡고 있던 시절 노무라 가쓰야 전 감독. 아사히(朝日)신문 제공
'무엇보다 항상 일하는 사람(何よりも自分は働く人間)'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던 노무라 가쓰야(野村克也) 전 감독이 '인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니칸(日刊)스포츠 등 일본 언론은 노무라 전 감독이 허혈성(虛血性)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11일 보도했습니다. 향년 85세.
이날 새벽 자택 욕조에 쓰러져 있던 노무라 전 감독을 가정부가 발견해 병원으로 긴급 후송했지만 결국 심장은 다시 뛰지 않았습니다.
현역 시절 노무라 전 감독. 아사히(朝日)신문 제공
1935년 일본 교토(京都)에서 태어난 노무라 전 감독은 야구로서는 무명 학교인 미네야마고(峰山高)를 나왔습니다.
신문 배달 등으로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 시절 전형적인 고학생.
1954년 고교를 졸업한 그는 여러 프로 팀 입단 테스트 도전했지만 오라는 곳은 난카이(南海·현 소프트뱅크) 한 팀뿐이었습니다. 그나마 계약금은 제로(0).
노무라 전 감독은 입단 첫해 1군에서 9경기를 소화했지만 이듬해에는 한 번도 1군 무대를 밟지 못했습니다. 난카이는 시즌이 끝난 뒤 그를 방출하려 했습니다.
이 소식 들은 노무라 전 감독은 "(모기업인) 난카이 전철에 뛰어들어 자살해 버리겠다"고 구단을 협박(?)한 끝에 난카이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현역 시절 노무라 전 감독. 아사히(朝日)신문 제공
그러다 1956년 주전 포수 마쓰이 준(松井淳·95)이 교통 사고를 당하면서 붙박이 자리를 꿰찼습니다.
원래 이 팀에는 쓰쓰이 게이조(筒井敬三·1925~1959)라는 백업 포수가 있었는데 이 시즌을 앞두고 창단 3년차였던 다카하시(高橋)로 팀을 옮기면서 노무라 전 감독에게 기회가 돌아간 것.
노무라 전 감독은 1957년 30홈런으로 생애 첫 홈런왕을 차지했습니다. 이후 1961년부터 1968년까지 8년 연속 홈런왕 타이틀을 지켰습니다.
노무라 전 감독은 1963년 52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2001년 터피 로즈(52·당시 야쿠르트)가 55홈런을 때리기 전까지 퍼시픽리그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었습니다.
1965년에는 타율 .320, 42홈런, 110타점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일본 프로야구에서 타격 3관왕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현역 시절 노무라 전 감독. 아사히(朝日)신문 제공
노무라 전 감독은 전형적인 노력파였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 투수 이나오 가즈히사(稲尾和久·1937~2007)의 약점을 찾으려고 비디오 테이프를 돌려 보고 또 돌려봤습니다. 그리고는 기어이 '쿠세(くせ·투구 때 버릇)'를 찾아내 이나오가 던진 공을 정타로 때려내기 시작했습니다.
노무라 전 감독이 없었다면 일본 야구를 떠올릴 때 '현미경 분석'이라는 낱말이 따라오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노무라 전 감독은 이렇게 실력과 노동관(work ethic)이 모두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요미우리(讀賣)를 9년 연속 일본시리즈 정상으로 이끈 나가시마 시게오(84·長嶋茂雄)나 왕정치(王貞治·80·일본명 오 사다하루)만큼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노무라 전 감독은 "왕정치나 사다하루가 해바라기라면 나는 조용히 일본해에 피는 달맞이꽃(王や長嶋がひまわりなら, 俺はひっそりと日本海に咲く月見草)"이라는 말로 자기 처지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1973년 리그 우승 당시 노무라 전 감독. 아사히(朝日)신문 제공
1970년부터는 감독 겸 선수로 뛰었습니다. 감독이자 포수이자 4번 타자로 팀을 이끌게 된 것.
1973년 팀을 퍼시픽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일본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에 1승 4패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후 1977년 해임 당할 때까지 난카이에서 총 22시즌을 뛰면서 타율 0.279, 645홈런, 1940타점을 남겼습니다.
현역 시절 노무라 전 감독. 아사히(朝日)신문 제공
1978년 롯데로 팀을 옮겨 선수 생활을 이어간 그는 1979년을 앞두고 신생팀 세이부(西武)로 옮겨 2년간 더 활약한 뒤 45세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인생에 은퇴는 없다. 현역에서 은퇴해도 '인간을 은퇴하는 것은 아니다'고 느꼈다(人生に引退はない. 現役引退しても「人間を引退するわけではない」と感じた)"는 말을 남겼습니다.
노무라 전 감독은 총 3017경기에 출전해 타율 .277, 2901안타, 657홈런, 1988타점을 남겼습니다. 안타, 홈런, 타점 모두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앞서 보신 것처럼 노무라 전 총 9차례 퍼시픽리그 홈런왕을 차지했고 5차례 리그 최우수선수(MVP)로 뽑혔습니다.
야쿠르트 시절 우승 후 헹가래를 받는 노무라 전 감독. 아사히(朝日)신문 제공
1989년 야쿠르트 감독이 된 뒤로는 'ID(Important Data) 야구'를 표방하면서 팀을 이끌었습니다.
야쿠르트는 총 네 차례(1992, 1993, 1995, 1997년) 퍼시픽리그 정상을 차지했고 그 중 세 번(1993, 1995, 1997년) 니혼이치(日本一) 자리에 올랐습니다.
1998년까지 야쿠르트 지휘봉을 잡고 있던 그는 1999년 한신(阪神)으로 팀을 옮겼지만 3년 연속 최하위에 그친 끝에 자리를 내줬습니다.
그 뒤 2006년 라쿠텐(樂天) 감독으로 복귀해 2008년 7월 15일 감독으로서 3000경기를 채우면서 세계 처음으로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3000경기에 출전한 인물이 됐습니다.
노무라 전 감독은 프로 팀에 몸담고 있지 않은 동안에도 신문 평론가와 TV 해설자로 꾸준히 일했습니다.
그가 스스로를 '무엇보다 항상 일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이유입니다.
노무라 전 감독은 2009년 "불평은 영원(ぼやきは永遠)"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불평이여 영원하라. 이상과 현실 사이에 있는 게 불평이다. 내가 불평을 그만두면 임종(ぼやきは永遠なり. 理想と現實のはざまにあるのがぼやき. 僕がぼやかなくなったらご臨終).
안타깝게도 이제 정말 그 불평을 들을 수 없게 됐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