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2019 월드시리즈 우승을 확정하고 기뻐하는 대니얼 허드슨(투수)과 얀 고메스. 메이저리그 홈페이지


올해 월드시리즈는 삼진으로 끝이 났습니다. 


메이저리그 올 시즌 전체 마지막 타석을 기록한 건 마이클 브랜틀리(32). 이 휴스턴 3번 타자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안방 구장 미닛 메이드 파크에서 열린 2019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9회말 2사 주자 없는 상황에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풀카운트 상황에서 워싱턴 투수 대니얼 허드슨(32)이 던진 슬라이더를 헛치고 말았습니다.



지난해 월드시리즈 마지막 플레이도 삼진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크리스 세일(30)이 보스턴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고 이에 맞서는 로스앤젤레스(LA) 다저스 타자는 매니 마차도(27)였습니다. 왼손 투수 세일이 던진 슬라이더는 오른손 타자 마차도의 몸쪽을 파고 들었습니다. 마차도는 이 공을 헛치면서 (문자 그대로) 무릎을 꿇었고 그걸로 승부는 끝이었습니다.



삼진으로 월드시리즈가 끝나는 것 자체는 특이한 일이 아닙니다. 올해까지 월드시리즈는 총 115번 열렸는데 그 중 22번(19.1%)이 삼진으로 끝이 났습니다.


첫 번째 월드시리즈가 열린 1903년부터 올해까지 정규리그 경기에서 타자가 타석에 들어선 건 총 1511만5691번. 이 가운데 13.7%(207만7419번)가 삼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월드시리즈 마지막 타석이 되면 삼진 비율이  40% 정도 올라가는 겁니다.


재미있는 건 '루킹(또는 스탠딩) 삼진' 비율은 거꾸로 내려간다는 점입니다.


삼진 22번 가운데 타자가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고 삼진을 당한 건 1903년, 1925년, 2012년, 2015년 등 네 번뿐입니다. 전체 삼진 가운데 18.2%가 루킹 삼진이었던 것. 1925년 구스 고슬린(1900~1971) 이후 2012년 미겔 카브레라(36)가 다시 루킹 삼진을 당하기 전까지 87년 동안에는 이런 일이 아예 없었습니다.


▌월드시리즈 끝내기(?) 루킹 삼진
 연도  투수  팀  타자  팀
 1903  빌 디닌  보스턴  호너스 와그너  피츠버그
 1925  레드 올드햄  피츠버그  구스 고슬린  워싱턴
 2012  세르히오 로모  샌프란시스코  미겔 카브레라   디트로이트
 2015  웨이드 데이비스   캔자스시티  윌머 플로레스  뉴욕 메츠


정규리그 기록은 당연히 이보다 높습니다. 베이스볼레퍼런스(www.bbref.com)에서 투구 상세 기록을 처음 확인할 수 있는 1988년부터 올해까지 32년 동안에는 전체 삼진 99만5670개 가운데 25.7%(25만5707개)가 루킹 삼진이었습니다.


월드시리즈 마지막 타석이 되면 타자가 루킹 삼진을 당할 확률이 30% 정도 줄어드는 셈입니다. 정규리그 전체 표본 가운데 80%가 23.3%~28.3% 사이에 몰려 있다는 걸 고려하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야구에서 루킹 삼진은 타자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웃으로 물러나는 유일한 케이스입니다. 심리학에서는 "타자들 마음 속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상대팀에 우승을 선물하는 모습으로 하이라이트 필름에 등장하고 또 등장하는 신세가 되고 싶지 않다'는 심리가 자리잡는다"고 설명합니다. '행동 편향(Action Bias)' 때문에 타자가 일단 방망이를 휘두르고 본다는 겁니다.


행동 편향을 설명할 때 가장 보기로 많이 드는 건 축구 골키퍼 사례입니다. 페널티킥 통계를 내보면 키커는 골대 왼쪽, 가운데, 오른쪽으로 각각 3분의 1씩 찹니다. 그렇다면 골키퍼도 3분의 1 정도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상대 득점을 막을 겁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절반은 왼쪽으로, 절반은 오른쪽으로 몸을 날립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골을 먹으면 비판에 시달릴 게 당연한 일이니까요.


2019 한국시리즈 정상을 차지한 뒤 기뻐하는 두산 배영수(왼쪽)와 오재일. 동아일보DB


그럼 한국시리즈는 어떨까요?


올해까지 한국시리즈는 총 37번 열렸고 이 중 11번이 삼진으로 끝이 났습니다.


일단 삼진 비율(29.7%) 자체가 남다릅니다. 프로야구 원년(1982년)부터 올해까지 전체 148만5570 타석 가운데 삼진으로 끝난 건 15.3%(22만67100타석)였습니다. 한국시리즈 마지막 타석이 되면 삼진 비율이 거의 두 배로 뛰는 셈입니다. 메이저리그하고 비교하면 한국시리즈 쪽이 삼진 비율 상승률도 두 배 이상 높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 삼진 11개 가운데 네 번(36.4%)이 루킹 삼진이었습니다. 최근 5년(2015~2019년) 동안 전체 삼진 5만583개 가운데 24.2%(3만8359개)가 루킹 삼진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한국시리즈 마지막 타석 때는 루킹 삼진 비율이 50% 이상 올라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타석 숫자를 기준으로 하면 최근 5년 동안 정규리그 경기 때는 전체 28만3749타석 가운데 4.3%가 루킹 삼진으로 끝이 났고 한국시리즈 마지막 타석이 되면 10.8%로 2.5배 이상 오릅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프로야구 챔피언 결정전 마지막 타석 결과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뭘까요?


저는 "'헹가래 투수'라는 개념이 그 이유가 아닐까"하고 짐작합니다. 


2018 한국시리즈 우승 후 환호하는 SK 김광현(왼쪽), 최정, 김성현. 동아일보DB


헹가래 투수는 문자 그대로 우승을 확정하고 나면 팀원이 마운드에 모여 헹가래 치는 투수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유래해 실제로는 헹가래가 없어도 우승을 확정한 아웃 카운트를 잡아낸 투수로 개념이 넓어졌습니다.) 승부가 기울고 나면 굳이 세이브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선발 에이스나 마무리 투수를 마운드에 올려 우승을 확정할 기회를 주는 겁니다.


그래서 2017년 KIA가 두산을 물리치고 한국시리즈 정상을 차지할 때는 '대투수' 양현종(31)이 마운드를 지켰고, 지난해 SK가 역시 두산을 상대로 한국시리즈 업셋에 성공할 때는 '에이스' 김광현(31)이 마지막 투수로 나섰습니다. 올해도 두산 김태형 감독과 최수원 주심이 마운드 방문 횟수를 착각하지 않았다면 한국시리즈 때 마무리로 활약한 이용찬(30)이 헹가래 투수가 됐을 겁니다.


이렇게 헹가래 투수가 마운드에 오르고 나면 상대 타자는 '어차피 끝났어'라는 신호를 받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몸이 움츠러드는지도 모릅니다. '괜히 나서지 말자'는 부작위(不作爲) 편향이 작동하는지도 모릅니다. 루킹 삼진을 당한 타자 네 명은 각각 선동열(55), 정대현(41), 김광현 그리고 이현승(36)을 상대했습니다. 모두 올타임 레전드가 아니면 해당 연도에는 언히터블 수준이었던 투수입니다.


▌한국시리즈 끝내기(?) 루킹 삼진
 연도  투수  팀  타자  팀
 1991  선동열  해태  임성우  빙그레
 2007  정대현  SK  이종욱  두산
 2010  김광현  SK  현재윤  삼성
 2015  이현승  두산  배영섭  삼성


헹가래 투수라는 말은 일본에서 쓰는 '도아게(胴上げ) 투수'라는 표현에서 유래한 것. 일본도 메이저리그보다는 한국과 사정이 비슷합니다. 애석하게도 헛스윙 or 루킹 삼진 비율은 따로 구하지 못했지만 일단 삼진 비율이 눈에 띌 정도입니다. 올해까지 일본시리즈는 총 70번 열렸고 그중 23번(32.9%)이 삼진으로 끝이 났습니다. (혹시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있는 곳을 알고 계시면 댓글 부탁드립니다.)


메이저리그에는 '그런 거 없습니다.' 올해 메이저리그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낸 허드슨은 메이저리그에서 10년 동안 뛰면서 49승 35패 17세이브 평균자책점 3.83을 기록한 게 전부입니다. 지난해 세일이 보스턴 마지막 투수로 마운드에 오른 건 마무리 투수 크레이그 킴브럴(31)이 포스트시즌 내내 워낙 흔들렸기 때문이지 '우승 순간 네가 마운드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한미일 어디서든 야구는 그저 야구인 것 같아도 야구와 야큐(野球) 그리고 베이스볼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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