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주형광을 기억하는가? 통산 87승 80패의 좌완 투수, 이제는 선발보다 구원으로, 그것도 원 포인트에 만족하는 노장 투수.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그래서 주형광에게 '기억'이라는 낱말은 어울리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주형광을 기억하는가? 핀 포인트 제구력과 영리한 투구 전략. 덧붙여 몸 쪽 승부를 즐기는 대담성까지. 사직 구장에 들어찬 롯데 팬들을 공 하나 하나에 열광케 했던 그 주형광을 기억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가 곧 승리의 대명사였고, 좌완 에이스의 표상이던 시절의 주형광을 기억하는가?

당시 주형광은 하일성 前해설위원이 200승을 예약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는 좌완 투수였고, '96 시즌 221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허튼 것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프로 출범 이후 한 시즌에 이보다 많은 삼진을 잡아낸 투수는 오직 팀 선배 최동원(223개)뿐이었다.

그렇게 주형광은 만 21세의 나이에 리그를 평정했다. 18승 7패 1세이브.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데뷔 이후 3년 평균 201⅓ 이닝을 소화하는 동안 총 9,464 개의 투구수를 기록했다는 사실엔 그리 큰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주형광은 '96 시즌을 마치고 군 훈련소에 입소했다. 하지만 어깨에 누적된 피로는 정상적인 훈련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군 병원에만 머물던 그는 곧 의병제대를 하게 된다. 그건 동시에 소속팀 롯데에서 체계적인 동계훈련을 소화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퇴소 후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주형광은 마운드에 올라 세이브를 기록했다. 모두들 '역시 주형광'이라는 찬사를 보내기에 바빴다. 그리고 시즌이 끝날 때까지 주형광은 총 2,254개의 공을 던져야만 했다. 동계훈련도 없이 말이다.

그 이후로도 주형광은 '98, '99 시즌 10승 투수 반열에 오르긴 했지만 '96 시즌에 보여줬던 도미넌트함은 사실 사라진 후였다. 투수와 관련된 거의 모든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우던 여드름 투성이의 소년은 그렇게 어깨와 팔꿈치에 누적된 피로와 함께 나이 들어갔다.

그래도 입단 후 7년 동안 77승 1,051탈삼진은 퍽 준수한 기록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7년간 던진 총 20,141개의 투구수가 그의 팔꿈치에 내려앉아 있었다. '90년대에 데뷔한 투수 가운데 7년차까지 그보다 많은 공을 던진 투수는 정민철(20,208)뿐이었다. 정민철 역시 전성기의 구위를 잃은 지 오래다.

그리고 다시 7년이 흐르고 있는 오늘 현재까지 그의 커리어에는 10승, 150탈삼진이 추가된 게 전부다. 7년간 투구수 역시 예의 20% 수준인 4,118개에 그쳤다. 이제는 더 이상 공을 예전처럼 던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제는 누가 봐도 노장 투수가 된 그의 나이, 이제 겨우 만 서른 하나. 손민한이 그의 고교 선배다.

그리고 이제 주형광은 더 이상 롯데의 28번이 아니다. 너무도 영예롭게 롯데의 좌완 에이스를 상징하던 그 번호는 이제 부산고 후배 장원준에게 돌아갔다. 자신의 화려한 시절을 후배가 재현해주길 바라는 선배의 따뜻한 배려였다. 하지만 장원준 역시 혹사의 그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표 1>  2006 시즌 혹사도(PAP) 상위 10걸

지난해 장원준의 혹사도(PAP, Pitcher Abuse Points)는 473으로 리그에서 1위였고, 평균 기록 또한 16.9로 모든 선발 투수들 가운데 가장 높았다. 장원준은 불펜에서 이미 100구 이상을 던지기로 알려진 투수. 따라서 실제 팔이 느끼는 부하는 이보다 훨씬 클 것이다.

하지만 올해 이 부문 1위는 장원준이 아니다. 장원준은 5번의 선발 등판에서 총 5의 PAP, 경기당 1.0의 안정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런 수치가 '보호'의 결과물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지난해의 무리를 고려한다면 적어도 4월 한 달 동안은 안정적인 투구수를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표 2>  2007 시즌 현재 혹사도(PAP) 상위 10걸

최고 혹사의 주인공은 예상대로 단연 류현진, 그는 누적 포인트에서는 52, 평균으로 볼 때는 2위보다 1.4배 정도 되는 혹사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해 그가 PAP 2위에 해당되는 엄청난 혹사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올해 던진 것만으로도 이미 류현진에게는 확실한 '보호'가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류현진은 부드러운 투쿠 매커니즘의 소유자다. 그리고 지난 해 시즌 종료후 실시한 정밀 검사에서도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토미 존 서저리를 경험한 아직 어린 투수일 뿐이다. 지금 아프지 않다고 해서, 아픈 게 빨리 낫는다고 해서 결코 안심할 수 있는 타입의 선수가 아니라는 얘기다.

또 다른 혹사의 주인공 염종석은 말한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 제가 필요하다면 저는 또 마운드에 오를 것입니다. 1992년에 그렇게 던졌던 것에 대해 단 한번도 후회를 해 본 적 없습니다. 그때처럼 다시 던질 수는 없겠지만, 저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행복해서는 안 됐다. 누군가 곁에서 말해주었어야 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성적이 나온다고, 주변에서 아무리 잘 한다고 응원해 준다 해도, 그렇게 계속 던지면 안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건 선수 본인에게도 상처지만, 팬들에게도 10년간 마운드를 책임져 줄 것이라 믿었던 에이스를 잃는 '꿈의 상실'이었기 때문이다. 혹사는 팬들의 꿈을 앗아가는, 팬들에 대한 모욕이다.

물론 류현진이 당장 탈이 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또 아는가? 앞으로 시간이 흘러 어떤 글의 첫 문장이 '류현진을 기억하는가?'로 시작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정말 그런 글은 두 번 다시 쓰지도, 읽고 싶지도 않다.


※ 혹사도(PAP) 계산법

선발 투수가 100개의 투구수를 채우지 못하고 마운드를 떠난 경우의 PAP는 0이다. 101개부터 110개까지는 투구 하나당 1점을 부여한다. 111개부터 120개까지는 2점이다. 이런 식으로 10개 단위로 150개까지 끊어서 계산한 다음, 그 이상은 무조건 6점을 부여한다. 이런 방식으로 선발 등판시 각각의 PAP를 계산해 모두 더하면 선수의 누적 PAP를 알 수 있다.


댓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