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배구 역사에 '러시앤캐시'라는 이름을 쓰는 팀은 두 번 등장합니다.
남자부 제7 구단 OK저축은행은 2013~2014 시즌 창단 때는 러시앤캐시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아니, 사실 지금도 애칭은 러시앤캐시입니다. 그러니까 프로야구 키움이 히어로즈라는 애칭을 써서 '키움 히어로즈'인 것처럼 OK저축은행도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가 공식 명칭입니다.
2012~2013 시즌에는 현재 우리카드가 러시앤캐시였습니다. 원래 이 팀은 2008년 '우리캐피탈 드림식스'로 창단했습니다. 그러다 여러 사정으로 모기업이 사라지면서 2011~2012 시즌 한국배구연맹(KOVO) 지원금으로 팀 살림을 꾸렸습니다. 2012~2013 시즌에는 이마저도 어려웠던 상황. 이를 어여삐 여긴(?) 아프로파이낸설그룹에서 팀 운영금 17억 원을 지원하는 대신 브랜드명 러시앤캐시를 팀 이름으로 쓰는 조건에 동의하면서 이 팀은 '(아산) 러시앤캐시 드림식스'가 됐습니다.
'네이밍 스폰서'로 재미를 본 아프로파이낸셜그룹은 2012~2013 시즌 종료를 앞두고 아예 구단을 인수하려고 했습니다. 경쟁자는 결국 나중에 새 주인이 된 우리금융지주. 두 회사가 인수권 경쟁을 벌이는 사이 이 팀 감독은 "돈이나 이미지를 떠나서 '정'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러시앤캐시가 더 낫고, 또 그렇게 되길 바란다"고 거침없이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많은 배구 팬이 기억하시는 것처럼 그 감독 이름은 김호철(64·아래 사진 가운데)이었습니다.
당시 김 감독은 이 팀과 2012~2013 시즌 1년 동안만 계약을 체결한 상황이었습니다. 새로 팀을 인수한 우리금융지주는 연장 계약을 제안했지만 김 감독은 저울질 끝에 결국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대신 그가 향한 곳은 친정팀 현대캐피탈이었습니다.
2012~2013 시즌이 끝나고 이 두 팀만 김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기려 했던 건 아닙니다. 또 다른 러시앤캐시에서도 김 감독을 제1 순위로 감독 영입 리스트에 올려두고 있었습니다. 아프로파이낸셜그룹에서 아예 새로 남자부 제7 구단을 창단하기로 하고 그에게 창단 감독을 맡기려 했던 것.
OK저축은행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우리 쪽만 영입 의사가 있던 게 아니었다. 팀을 만들면 감독을 맡기로 약속이 다 되어 있던 상태였다"면서 "그러다 갑자기 약속을 뒤집고 현대캐피탈로 가버려서 황당했다"고 전했습니다. 이 말이 맞다면 김 감독이 '러시앤캐시가 팀을 인수하는 게 낫다'고 인터뷰했던 게 단지 네이밍 스폰서에 대한 고마움 때문만은 아니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이에 대해 의식한 듯 김 감독은 다시 현대캐피탈을 맡으면서 "다른 팀에 가면 삼성화재를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트레이드나 자유계약선수(FA) 시장을 통해 선수단을 정비할 것이다. 떠나 있는 동안 이 팀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에전의 명성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인터뷰했습니다.
구단은 이해 FA 시장 최대어였던 '월드 리베로' 여오현(41)을 취임 선물로 안겼고, 여오현은 팀에 2013 안산 우리카드컵을 선물했지만, 현대캐피탈은 2013~2014 V리그에서는 끝내 삼성화재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그다음(2014~2015) 시즌에는 초반부터 내분설이 흘러나오면서 팀이 흔들렸고, 현대캐피탈은 정규리그 5위로 시즌을 마치면서 창단 후 32년 만에 처음으로 겨울 리그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김 감독은 결국 자진사퇴 형식으로 팀에서 물러났습니다.
현대캐피탈을 떠난 뒤 가족이 있는 이탈리아로 건너갔던 김 감독은 2017년 4월 남자 국가대표 감독으로 현장에 돌아왔습니다. 당시 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에서 대한배구협회(현 대한민국배구협회)는 후보자에게 '국가대표팀 계약기간 중 프로팀으로의 이직 금지'를 요구했습니다.
김 감독이 대표팀 감독이 됐다는 건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김 감독은 2022 항저우(杭州) 아시아경기(아시안게임) 때까지 계약을 맺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OK저축은행에서 김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내정했다는 언론 보도에 논란이 벌어지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먼저 내정은 사실입니다. OK저축은행 관계자는 "현재까지 김 감독과 구단 최고위급 관계자가 두세 차례 만나 협상을 벌였고 다음 시즌부터 팀을 맡기로 합의했다. 김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 문제를 해결하고 오겠다고 해서 발표를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고 전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OK저축은행에서 먼저 감독 자리를 제안한 게 아니라 김 감독이 '나를 쓸 생각이 있냐'고 먼저 물어왔다는 것. 이 관계자는 "김세진 전 감독이 지난달 사퇴 의사를 밝힌 뒤 김 감독이 '아직 감독을 정하지 않았으면 내게도 기회를 달라. 좋은 팀을 만들겠다'고 제안했다"고 전했습니다.
배구계 최고 어르신급이라고 할 수 있는 김 감독이 이런 선택을 내린 이유는 뭘까요? 국가대표 전임 감독은 팀을 마음대로 옮길 수 없지만 배구협회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남자 대표팀은 지난해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를 1승 14패로 마감했습니다. 이로써 한국은 이 대회 첫 번째 탈락팀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됐습니다. 이제 한국은 세계 배구 1부 리그격인 VNL이 아니라 그 아래급인 챌린저컵에 참가해야 합니다. 김 감독 지도력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나타났을 게 당연한 일.
때마침 차해원 여자 대표팀 감독도 FIVB 세계선수권대회 성적 부진(1승 4패) 등을 이유로 자리를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배구협회 안팎에서 김 감독에게 여자 대표팀을 맡기고, 남자 대표팀 감독을 새로 구하자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런 목소리 대부분은 '자가발전'. 본인이 감독 자리에 뜻이 있는 이들이 목소리를 크게 냈던 겁니다.
목소리 큰 이들 중에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드문 법. 배구협회에서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챌린지컵에 참가에 부정적인 자세를 취자하 김 감독은 직접 스폰서를 구하러 뛰어 다녔습니다. 친정팀인 현대캐피탈에서 '이번에는 좀 어렵다'는 답변을 듣자 러시앤캐시 시절 인연이 있던 OK저축은행에 접촉하게 됐고 이 과정에서 결국 본인 자리까지 이야기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 (잘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지만) 김 감독이 자기 살 길을 찾으려 했던 게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앉아서 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테니 말입니다. 게다가 OK저축은행은 어떤 의미에서든 인연이 있던 팀이기도 했고 말입니다.
김 감독은 오늘(15일) 오전 오한남 배구협회장(왼쪽)과 만나 향후 거취에 대해 논의할 계획입니다. 아마 이변이 없는 한 계속 국가대표 감독 자리를 유지하겠다는 결론이 나올 확률이 높은 상황. 그렇다고 해도 이미 배구 팬이 받은 상처가 너무 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