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수(33·대한항공·사진)는 정말 좋은 세터입니다.
그가 얼마나 좋은 세터인지 보여주는 대표 사례는 2014년 국제배구연맹(FIVB) 월드리그 국제남자배구대회와 같은 해 열린 인천 아시아경기(아시안게임). 당시 한선수는 상근예비역으로 국방의 의무를 이행 중이었지만 태극마크를 달고 코트 위에서 경기를 조율했습니다. 종목을 막론하고 국군체육부대(상무) 소속이 아닌 현역 군인이 국가대표로 뽑힌 건 전례가 거의 없는 일입니다.
한선수가 이렇게 특별 대우(?)를 받을 수 있던 건 그가 대체 불가능한 자원이었기 때문. 두 대회 대표팀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세터는 한선수와 막 프로 데뷔 시즌을 마친 이민규(27)뿐이었습니다. 당시 대표팀을 이끌고 있던 박기원 현 대한항공 감독은 "한선수가 합류해서 천만다행"이라며 "이민규가 잘한다고 하지만 한선수보다는 아직 한 수 아래인 게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한선수는 올 시즌에도 세트당 평균 세트(토스) 성공 10.5개로 이 부분 1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부분 2위(10.1개)인 KB손해보험 황택의(23)와는 적지 않은 격차. 세트 성공은 세터가 띄운 공을 공격수가 득점으로 연결했을 때 남는 기록입니다. 농구로 치면 어시스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농구와 마찬가지로 배구에서도 어시스트를 기록하려면 '노 마크 찬스'를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단, 배구에서는 코트를 좌우로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노 마크 찬스뿐 아니라 일대일 찬스를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실제로 25일 현재까지 상대 블로커가 0명 또는 1명일 때 공격 성공률은 55.9%로 2명 또는 세 명일 때(48.3%)보다 15.7% 높습니다. 일본 배구 만화 '하이큐!!'에 괜히 "스파이크 앞의 벽을 연다. 그러려고 세터가 있는 거야"라는 대사가 등장한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벽을 잘 열면 열수록, 제가 2017년 기사에 쓴 표현을 다시 인용하면, 상대 블로킹을 '잘 벗기면' 벗길수록 좋은 세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점에 있어서도 한선수가 독보적입니다.
한선수가 현재까지 공격수를 향해 띄운 공은 총 2588개. 한국배구연맹(KOVO)에서는 이 가운데 2543개에 대해 상대 블로커 숫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42.1%(1070개)가 상대 블로커가 없거나 한 명인 공격수 쪽으로 날아갔습니다. 팀 세트 시도 중 30% 이상 책임진 선수 가운데 이 비율이 40%를 넘는 건 한선수가 유일합니다.
▌세트시 상대 블로커 0 or 1명 비율 (25일 현재)
순위 | 이름 | 구단 | 0+1 |
① | 한선수 | 대한항공 | 42.1% |
② | 황택의 | KB손해보험 | 33.3% |
③ | 이승원 | 현대캐피탈 | 32.7% |
④ | 이원중 | 현대캐피탈 | 31.9% |
⑤ | 이민규 | OK저축은행 | 29.6% |
⑥ | 노재욱 | 우리카드 | 24.0% |
⑦ | 이호건 | 한국전력 | 23.4% |
⑧ | 김형진 | 삼성화재 | 19.1% |
한선수는 팀이 KB손해보험에 3-1 승리를 거둔 25일 프로배구 2018~2019 도드림 V리그 안방 경기에서 통산 세트 1만3000개 기록(1만3004개)도 남겼습니다. V리그에서 한선수보다 통산 세트 기록이 많은 건 권영민 한국전력 코치(39·1만31개)뿐입니다. 공교롭게도 대한항공은 다음달 3일 한국전력을 상대로 다음 경기를 치르기 때문에 한선수는 권 코치가 지켜보는 가운데 통산 최다 세트 기록을 새로 쓸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선수는 "프로 데뷔 후 큰 기대를 받지 못하던 선수였는데 대한항공에서 많은 기회를 잡아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언제나 긍정적인 생각으로 즐겁게 운동한 게 선수 생활을 이어오는 원동력이 된 것 같다"며 "몸 관리를 철저하게 해서 마흔 (살)까지 운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야구에서 포수가 그런 것처럼 배구 세터도 개인 성적만큼 팀 성적이 중요한 자리. 한선수가 주전 세터 자리를 꿰찬2008~2009 시즌 이후에도 우승과는 거리가 있었던 대한항공이지만 지난 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서 승리하면서 한선수에 대한 평가도 한 단계 더 올라갔습니다. 대한항공은 올 시즌 현재도 남자부 1위 자리에서 고공 비행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