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아주 가끔은 어떤 투수를 응원하면서도 그 투수가 승리를 기록하지 못하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올해 메이저리그에서는 제이컵 디그롬(30·뉴욕 메츠·사진)가 그런 투수였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시즌 9승에서 멈추기를 바랐습니다.


못된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선발투수로 시즌 9승을 기록하고도 사이영상을 받을 수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 그래서 디그롬이 9월 26일(이하 현지시간)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기어이 시즌 10승(9패)을 채웠을 때 어쩐지 아쉬운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가 '자이언상' 아니 사이영상 수상자라는 사실만큼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4일 미국야구기자협회(BBWAA)에서 2018 사이영상 투표 결과를 공개한 데 따르면 디그롬이 1위표 30장 가운데 29장을 받는 등 총 207점으로 맥스 슈어저(34·워싱턴)을 제치고 올해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받게 됐습니다.


▌2018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투표 결과

BBWAA 홈페이지


디그롬은 올해 평균자책점 1.70으로 양대 리그를 통틀어 제일 낮은 기록을 남겼고 투구 이닝(217이닝)도 220과 3분의 2이닝을 던진 슈어저에 이어 양대 리그 전체에서 두 번째로 많았습니다. 문제는 득점 지원. 그가 선발 등판했을 때 메츠 타선은 3.53점(57위)을 뽑는 데 그쳤습니다. 올해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가 58명이니까 꼴찌에서 두 번째 득점 지원에 만족해야 했던 겁니다.


그게 타선으로부터 평균 5.27점(10위) 지원을 받은 슈어저가 평균자책점 2.53으로 18승(7패)을 기록할 때 디그롬은 10승밖에 거두지 못한 이유입니다. 10승은 지금까지 사이영상을 탄 선발투수가 남긴 최저 승수입니다. 이전까지는 1981년 페르난도 발렌수엘라(58·당시 로스엔젤레스 다저스), 2010년 펠릭스 에르난데스(32·시애틀)가 기록한 13승이 기록이었습니다. (1981년은 파업 때문에 정상 일정을 소화하지 못했습니다.)


디그롬과 정반대 지점에 위치한 투수로는 루카스 지올리토(24·시카고 화이트삭스·사진)를 꼽을 수 있습니다. 지올리토는 올해 평균자책점 6.13으로 양대 리그에서 규정 이닝을 채운 투수 가운데 제일 나쁜 성적을 남겼습니다. 승수는? 디그롬하고 똑같이 10승(13패)입니다. 


이건 무슨 뜻일까요? 선발투수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닙니다. 당연히 중요합니다. 아니라면 5경기마다 한 번씩 등판하는 선발 투수가 올해 연봉 톱10 메이저리거 가운데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지는 못할 겁니다. 


이 결과는 투수에게 승리가 큰 의미 있는 기록이 아니라는 방증입니다. 물론 패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구팬들은 투수를 흔히 10승, 15승, 20승 투수로 구분하고는 합니다. 그렇다고 디그롬과 지올리토가 10승 투수로 엇비슷한 수준이라고 평가하는 팬은 없을 겁니다.


무대를 한국 프로야구로 옮겨 보겠습니다. 올해 다승왕은 18승(3패)을 기록한 후랭코프(30·두산·사진 오른쪽)입니다.


같은 팀 동료 린드블럼(31·왼쪽)은 후랭코프(3.74)보다 0.86 낮은 평균 자책점 2.88(1위)로 시즌을 마쳤지만 15승 4패로 승수는 물론 승률에서도 후랭코프에 뒤졌습니다.


그렇다면 올해 두산 에이스는 후랭코프인가요? 개막전 선발이야 린드블럼이 이미 한국 프로야구 경험이 있으니 그랬다고 쳐도, 김태형 두산 감독이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도 린드블럼에게 맡긴 걸 보면 꼭 후랭코프가 더 앞선 투수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본도 사정이 비슷했습니다. 퍼시픽리그 정규리그 1위 세이부는 팀내 다승 1위(16승) 다와타 신사부로(多和田眞三郞·25)가 아니라 평균자책점이 3.08로 제일 좋았던 기쿠치 유세이(菊池雄星·27·사진)를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 1차전 선발로 내세웠습니다. 센트럴리그 1위 히로시마가 오세라 다이치(大瀨良大地·27)에게 같은 자리를 맡긴 건 그가 팀내 최다승(15승) 투수일 뿐이 아니라 평균자책점(2.52) 선두이기도 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기자단이 사이영상 투표할 때도 승수를 별로 보지 않고, 감독이 챔피언 결정전 선발 투수를 정할 때도 승수가 제일 중요한 기준은 아니었던 겁니다. 이걸 이상하다고 느끼는 야구팬도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투수를 평가할 때 꼭 승수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 걸까요?


제일 큰 이유는 승리가 '원래 이렇게 야구 이야기를 좀더 풍성하게 만들려고' 만든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선발투수는 왜 5회를 채워야 승리투수가 될 수 있을까' 포스트 내용을 옮겨 보면:


미국야구조사협회(SABR) 회원 프랭크 바카로는 "타임머신을 타고 1872년으로 돌아가 '투수에게 승리나 패전을 기록하게 된다'고 이야기하면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승리투수라는 개념을 '발명'한 건 '야구 기록의 아버지'로 불리는 헨리 채드윅(1824~1908)이었습니다. 채드윅은 사업가로 변신한 스팔딩이 해마다 펴내던 책 '스팔딩 가이드' 1885년판(1884년 발행)에 처음으로 승리투수라는 개념을 등장시켰습니다. 패전투수가 등장한 건 4년이 지난 1888년 7월 7일이었습니다.


당시 채드윅은 뉴욕타임스 기자였습니다. 기자에게는 항상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경기 그 자체 이야기도 좋아하지만 사람 이야기를 더 좋아합니다. 팀이 이기고 지는 것도 물론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팀은 이겼는데 잘 던진 투수가 승리를 기록하지 못했으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투수가 정말 잘 던졌는데 야수 실책 같은 걸로 결국 패전 투수가 된다면 더더욱 재미있습니다. 승패 기록이 없다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승리나 패배라는 기록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이브나 홀드를 고안해낸 사람 직업은 무엇이었을까요? 네, 생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물론 승리투수가 패전투수보다 훨씬 더 잘 던졌습니다. 2016~2018 한국 프로야구에서 기록지에 승리투수로 이름을 남긴 선발투수는 평균 6과 3분의 1이닝을 던지는 동안 자책점을 1.64점밖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평균자책점 2.34). 반면 패전투수는 4와 3분의 2이닝 동안 자책점 4.49점으로 평균자책점으로 환산하면 8.86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투구 이닝 및 자책점별 기록을 뽑아 보면 승리투수로 이름을 올리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닝 중간에 내려가는 건 다음 투수 영향을 받을 수 있어 제외했습니다.)


▌2016~2018 프로야구 투구 이닝 및 자책점별 승리투수 확률

 투구 이닝  자책점  승리투수 확률
 6  0  70.8%
 1  54.4%
 2  41.7%
 3  35.3%
 7  0  75.2%
 1  69.3%
 2  53.5%
 3  44.4%
 8  0  82.8%
 1  63.6%
 2  48%
 3  25%
 9  0  100%
 1  91.7%
 2  85.7%
 3  60%


퀄리티 스타트 마지노선(6이닝 3자책점)을 기록해도 승리투수가 될 확률은 50%가 되지 않습니다. 퀄리티 스타트+ 마지노선(7이닝 3실점)도 마찬가지. 7이닝 동안 2자책점(평균자책점 2.57)을 남기고 마운드에서 내려가도 46.5%는 승리투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저 선수는 10승 투수가 재목'이라는 평가는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셔널리그 또는 센트럴리그에서 선발 투수가 솔로 홈런을 쳐서 1-0으로 이기지 않는 이상 투수 혼자 승리를 불러올 수는 없으니까요. 괜히 선발 9승짜리 사이영상 수상자를 기대했던 게 아닙니다.


하지만 실제로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한다는 건 아마 모든 에이스에게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 디그롬도 마지막 경기에서 시즌 10승을 달성한 뒤에야 "이제 올해 목표를 달성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 아메리칸리그에서는 180과 3분의 2이닝을 던져 21승 5패, 평균자책점 1.89를 기록한 블레이크 스넬(26·탬파베이)이 사이영상 수상자로 뽑혔습니다. 180과 3분의 2이닝 역시 사이영상을 수상한 선발투수가 남긴 최저 이닝입니다. 스넬은 '오프너', '불페닝' 같은 투수 운용이 자리잡은 탬파베이에서 유일하게 선발 로테이션을 지킨 투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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