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스코어'는 야구에서 8-7 경기를 가리키는 표현. 야구팬 사이에서는 상식처럼 통합니다. 미처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아마 박문각 '일반상식'에도 그렇게 나올 겁니다. 재키 로빈슨을 첫 번째 흑인 메이저리거라고 잘못 표현했던 책이니 말입니다. (로빈슨은 메이저리그에서 인종차별을 무너뜨린 선수이지 첫 번째 흑인 메이저리거가 아닙니다. 19세기에도 아프리카계 미국인 메이저리거는 있었습니다.)
그럴 듯한 유래도 있습니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1917~1963·사진 가운데)이 기자들에게 "나는 8-7 경기가 제일 재미있다"고 말했다는 거죠. 동아닷컴에서 운영하고 있는 '현대시사용어사전'에도 그렇게 나옵니다. 구체적으로 1960년 대통령 선거 TV 토론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왜 케네디 대통령은 관중석에서 시구를 하고 있는 걸까요? 사실 미국에서는 원래 저렇게 시구하는 게 정석이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부터 마운드 위에서 하는 걸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미국인들은 케네디 스코어가 뭔지 모릅니다. 구글에서 영어로 'Kennedy Score'를 찾아 보면 '한국에서 이런 말을 쓰는데 너희는 들어 봤냐'는 글이 제일 위에 뜹니다. 폴 딕슨 야구사전에도 케네디 스코어라는 말은 없습니다. 뉴욕타임스(NYT)나 워싱턴포스트(WP) 같은 주요 매체에서도 이 표현을 쓰지는 않습니다. 케네디 스코어라는 말은 콩글리쉬일 확률이 아주 높은 겁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찾아 보면 경향신문 1986년 4월 1일자에 이 표현이 제일 처음 등장합니다.
원광대는 이날도 막강의 동국대를 역시 8|7로 침몰시켜 준준결승과 결승을 모두 케네디스코어로 이기는 진기록을 수립했다.
만우절이라고 저 말을 쓴 건 아닐 테고(-_-;;) 별다른 설명이 없는 걸로 볼 때 이미 케네디 스코어라는 말을 널리 쓰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모든 옛날 신문 기사를 제공하는 건 아니니까요.
한 선배는 "(1978년) 한·미 대학야구 때부터 케네디 스코어라는 말이 등장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 대회 때는 고의사구를 던질 때 공을 직접 던지는 대신 구심에게 통보만 하고, 투수와 포수는 2아웃 이후에 반드시 대주자로 바꾸는 등 독특한 규칙을 적용한 대회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케네디 스코어가 등장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인터넷을 계속 뒤지다 보니 미국 대통령 중에 비슷한 말을 한 인물이 있기는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1882~1945). 1937년 1월 25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NYT에서 야구를 취재하던 제임스 P 도슨 기자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에 8-7이라는 점수가 등장합니다.
My idea of the best game is one that guarantees the fans a combined score of not less than fifteen runs, pided about eight to seven. (8-7 정도로 승부가 갈리는, 양 팀이 합쳐 팬들에게 15점 정도를 선보이는 경기가 제게는 최고 게임입니다.)
그렇다면 8-7 승부는 차라리 '루스벨트 스코어'가 되어야 맞을 겁니다. (실제로는 9-8 승부를 루스벨스 스코어라고 부르는 일이 드물게 있습니다.) 아니면 '대통령 스코어'라거나요. 그런데도 여전히 '케네디 스코어'라고 불리고 있으니 의문일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이미 상식으로 완전히 굳어졌는데 이제와 바꾸기도 힘든 노릇이고 말입니다.
2012~2014 프로야구에서 8-7 승부는 모두 21번 나왔습니다. 이 3년 동안 총 1684경기를 치렀으니 약 1.2% 정도만 케네디 스코어인 셈입니다. 사실 타격전에, 접전에, 희소성까지 높은 승부니까 재미있으려면 얼마든 재미있는 게 맞을 겁니다. 누가 처음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케네디 스코어를 미국까지 퍼뜨려 보는 건 어떨까요?
아, 축구에서 쓰는 '펠레 스코어(3-2)'도 그냥 넘어갈 수 없겠죠? 당연히(?) 펠레 스코어도 한국에서만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