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는 데릭 지터(40·뉴욕 양키스)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과대평가 받은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양준혁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은퇴 때처럼 '적장에게 건네는 편지' 같은 걸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건 그런 까닭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매력적인 선수라고 믿고 있기도 합니다. 지터가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극적으로 커리어를 쌓을 수 있을까요?
양키스타디움 마지막 타석은 끝내기 안타
지터는 25일(이하 현지시간) 양키스타디움에서 마지막 안방 경기에 나섰습니다.
포텐이 터진 건 5-5로 맞선 9회말 1사 2루. 지터는 이 상황에서 우전 안타를 날렸고, 2루에 있던 안토안 리처드슨(30)이 홈 플레이트를 밟으면서 경기가 끝났습니다.
양키스타디움을 찾은 만원 관중에게 '끝내기 안타'를 작별 선물로 건넨 겁니다.
시청률 조사 업체 닐슨에 따르면 이 마지막 타석은 가구 시청률 기준으로 10.84%를 기록했습니다.
이를 시청자 숫자로 환산하면 약 125만 명이 지켜본 것. 양키스 경기를 중계하는 TV채널 YES 네트워크 역사상 가장 많은 시청자가 지켜본 장면이 바로 이 마지막 타석입니다.
지터는 이날 그 전에도 0-2로 뒤진 1회 무사 1루에서는 적시 2루타로 추격의 불씨를 댕겼고, 본인이 득점에 성공하며 2-2 균형을 맞췄습니다.
7회에는 1사 만루에서 상대 실책에 편승해 4-2 역전에 성공하는 타구를 날렸습니다.
그리고는 끝내기 안타로 문자 그대로 승부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게다가 앞으로 자기 야구 인생에 남은 마지막 3경기 상대는 '숙적' 보스턴입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는 보통 직전 시즌 중후반에 스케줄을 발표하고, 지터는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은퇴를 예고했는데 기가 막힌 일정을 받게 된 겁니다.
방송인 노홍철 씨가 아니라 지터가 진짜 '럭키 가이'인 셈이입니다.
3000안타는 양키스타디움에서 홈런으로
그뿐만 아닙니다.
지터는 2011년 9월 9일 3000번째 안타를 때렸는데 홈런이었습니다. 장소는 역시나 양키스타디움.
이전까지 양키스 멤버로 3000안타를 친 선수는 한 명도 없었고, 방문 팀 선수를 포함해도 양키스타디움에서 3000번째 안타를 기록한 선수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옛 양키스타디움에서도 없었습니다. (지금 쓰는 양키스타디움은 2009년 문을 열었습니다.)
웨이드 보그스(56)가 3000안타를 홈런으로 달성하지 않았다면 그마저 처음이 될 뻔했습니다.
유격수가 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플레이
수비에서도 스타성은 단연 빛났습니다.
지터는 오클랜드하고 맞붙은 2001년 아메리칸리그 디비전시리즈 3차전에서 '보고도 믿기 힘든' 수비를 선보였습니다.
양키스 '우익수' 셰인 스펜서(42)가 던진 공을 '유격수' 지터가 커트해 포수 호르헤 포사다(43)에게 연결한 것. 아니, 도대체 어떻게 유격수가 1루 파울라인까지 달려와 공을 연결한 걸까요?
이 경기 전까지 양키스는 안방에서 오클랜드에 무승 2패로 밀렸는데요, 이 수비로 제러미 지암비(40)를 잡아냈고, 결국 1-0 리드를 지키며 시리즈 첫 승을 거뒀습니다.
이후 '리버스 스윕'으로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 나간 뒤 결국 월드시리즈 무대까지 밟았습니다. (그리고 이해 월드시리즈에서 김병현은…)
지터! 그리고 세이버메트릭스
메이저리그 기록 전문 사이트 베이스볼 레퍼런스에 따르면 지터는 통산 WAR(Wins Above Replacement) 71.7로 야수 중에서 역대 58위밖에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아드리안 벨트레(35)도 77.7로 지터보다 통산 WAR가 높습니다
공격 WAR는 20위(95.3)지만 수비가 문제였습니다. 지터가 20년 동안 뛰면서 수비 WAR가 0점 이상이었던 건 단 세 번뿐이었습니다. 골드글러브를 4번이나 탄 게 의아할 정도.
지터는 1996년 아메리칸리그 신인상 수상자지만 단 한 번도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로 뽑힌 적도 없고, 실버 슬러거로 뽑힌 것도 골드글러브와 마찬가지로 4번뿐입니다.
심지어 이달의 선수도 1998년 8월 딱 한 번이 전부. 이 주의 선수는 세 번입니다.
확실히 기록으로 보면 지터는 그리 대단한 선수는 아닙니다. 세이버메트릭스 지표로 특정 선수가 명예의 전당에 입회할 가능성을 알아보는 JAWS(Jaffe WAR Score system)로 따지면 지터는 유격수 중에서도 12위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가 지터보다 더 야구를 드마라틱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영화 시나리오라면 '너무 뻔해서 재미없다'고 했을 저런 장면을 현실에서 보여줄 수 있었을까요?
'세이버매트릭스의 아버지' 빌 제임스가 전통적인 지표를 가지고 만든 명예의 전당 모니터를 보면 지터는 337점으로 역대 11위입니다. 미키 맨틀(300점·15위)이나 조 디마지오(270점·19위) 같은 양키스 전설을 뛰어넘는 점수입니다.
어쩌면 그런 차이일 겁니다. JAWS를 만든 제이 제피는 어지간한 다이하드 세이버메트리션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인물에 가깝지만, 제임스가 누군지 아는 건 상식에 속하는 문제라는 차이.
숫자와 무관하게 '누가 지터를 의심했습니까'하고 되묻게 할 수 있는 스타성.
숫자가 뭐라 하든 '연모의 영역'에서 지터는 영원히 뉴욕의 연인으로 남을 겁니다. 암, 두말할 것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글 제목은 2006년(헉!)에 썼던 '이치로!와 세이버메트릭스'에서 따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