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일렉트로닉 아츠(Electronic Arts·EA)에서 1989년 내놓은 컴퓨터 게임 'NBA 농구(Lakers vs Celtics and the NBA Playoffs)' 시작 화면. 1990년대 초까지 국내에서도 인기가 아주 좋았다. 익숙해지면 실제 농구 경기보다 점수를 퍽 많이 넣게 되는데 200점부터는 더 이상 점수가 올라가지 않았다.


"요즘엔 다들 NBA 안 보나봐."

요즘 동아일보 스포츠면에 미국프로농구(NBA) 스타 릴레이 인터뷰가 실리고 있습니다. 신진우 기자가 쓰는 이 시리즈는 크리스 폴을 시작으로 르브론 제임스, 레이 앨런과 몬타 엘리스, 그랜트 힐 이야기까지 다뤘습니다.


저는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신 기자는 반응이 기대만 못한 느낌인 모양입니다. 저하고 입사동기인 신 기자는 얼마 전 "요즘엔 사람들이 NBA를 잘 안 보나봐"하고 이야기하더군요. 신 기자는 저하고 동갑이기도 합니다. 저희들 학창 시절이 아마 국내에서 NBA 인기가 가장 높을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가 처음 NBA라는 세계를 알게 된 건 사촌 형 덕분이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습니다)에 다닐 때 형은 이따금 NBA 경기를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저희 집에 가져오곤 했습니다. 그때는 아직 SBS에서 NBA 중계를 하기도 전이라 국민학생이 NBA를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형이 가져온 비디오테이프도 아마 AFKN을 녹화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덕분에 저는 새 비디오를 볼 때마다 좋아하는 선수가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빙 '매직' 존슨에 반했다가 찰스 바클리 광팬이 됐고, 결국 스코티 피펜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남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저 혼자 여전히 우기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스코티 피펜은 마이클 조던 없이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그건 조던도 마찬가지다.')



15년 동안 나를 사로잡은 애송이

그러던 어느 수요일 밤 11시, 한창도 해설위원과 함께 하던 SBS 중계를 봤습니다. 찰스 바클리가 뛰던 피닉스 선즈 중계였는데 상대 팀이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였습니다. 1주일에 딱 한 번 밖에, 그것도 편집한 화면으로 보는 중계라면 정말 보고 싶지 않았던 팀이었죠.


하지만 경기를 보면서 저는 금세 흥분했습니다. 바클리가 막히고, 밀리고, 뚫리더군요. 그것도 이제 갓 NBA 무대에 데뷔한 애송이한테 말이죠. 저는 다음 날 학교에서도 온통 그 애송이 이름만 외치고 다녔습니다. 크리스 웨버. 제 생애 가장 좋아한 NBA 선수.


웨버는 케빈 맥헤일만큼 믿음직스러웠습니다. 칼 말론처럼 집요하고 꾸준했죠. 그리고 누구보다 골밑을 잘 지키는 수비수였습니다. 또 3점 슛을 날리고 속공을 이끌 만큼 다재다능했습니다. 무엇보다 웨버는 패스를 할 줄 아는 빅맨이었죠. 그게 참 좋았습니다.


웨버가 전성기를 보낸 곳은 역시 새크라멘토 킹스였습니다. 팀 자체가 웨버 스타일과 잘 맞았습니다. 모션 오펜스는 볼 소유욕이 참 많은 웨버에게 이상적인 패턴이었죠. 팀 구성도 화려하지 않지만 끈끈했습니다. 블라디 디박, 페이야 스토야코비치, 덕 크리스티 그리고 마이크 비비.


왼쪽부터 크리스티, 비비, 스토야코비치, 웨버, 디박


2002년 드디어 킹스에게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전형적인 서고동저(서부 컨퍼런스에 강팀이 많은 현상). LA 레이커스만 넘으면 챔피언 자리에 오를 수 있던 그 때, 디박이 쳐낸 공이 로버트 오리에게 굴러가면서 꿈은 깨졌습니다. 그 시즌 가장 강력한 컨텐더(contender)로 손꼽혔지만 서부 컨퍼런스(conference) 파이널이 한계였습니다.



이듬해도 팀은 막강했습니다. 하지만 댈러스 매버릭스와 벌인 서부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웨버는 무릎을 움켜쥔 채 플로어에 쓰러집니다.



그걸로 그때까지 알던 웨버, C-Webb은 끝이었습니다. 한 쪽 무릎으로는 민첩함, 기민함 같은 운동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죠. 웨버는 자기 집(Webb's House) 아코 아레나(Arco Arena)를 떠나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 됐고, 디트로이트 다시 골든스테이트를 거쳐 2007-2008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합니다.



크리스 웨버, 자신을 과거로 만드는 리더.

결국 우승 반지 하나 끼우지 못했고 MVP도 타지 못했지만 그래도 웨버는 여전히 제게 최고의 농구 선수입니다. 어쩐지 노예처럼 뛰던 그 모습, 대부분 약팀으로 트레이드됐지만 팀을 정상으로 올려놓은 리더십. 이기적으로 굴었던 때가 없던 건 아니지만, 그는 선수 생활 대부분 자신을 과거로 만들면서 팀에게 미래를 주는 선수였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김은식 씨 말씀을 조금 바꿔 웨버를 추억하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넘어 꼭 이겨야만 하는 경기, 가장 절박한 순간의 슈팅을 놓고 고민해본다면, 나 역시 최선의 선택은 웨버가 아니라 조던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단순히 이기고 지는 것을 넘어, 박살을 내고 가루를 만들어버리든, 하얀 재가 되어 사라지든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신념과 자존심의 승부라면, 이제 무릎 한 쪽으로 제대로 뛰지 못할지라도 다시 한번 웨버를 불러내 함께 몸을 던져보고 싶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는 전형적인 '에이스'는 아니었지만, 걸어야 할 것을 걸고 노려야 할 것을 노려 확실하고 깔끔하게 완전연소시켜버리는 처절한 승부사였기 때문이다.



당신 덕분에 친구들한테 늘 이상한 팀 응원한다는 핀잔 참 많이 들었지만 당신을 응원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요. C-Webb, You've completed my basketball. Thank you and thank you.


여러분이 가장 좋아했던 NBA 선수는 누구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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