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1983년 4월 10일 잠실구장. MBC 9번 타자 정영기가 롯데 다섯 번째 투수 김문호의 초구를 받아쳐 우익수 오른쪽에 떨어뜨렸다. 2루에 대주자로 나가 있던 김봉기가 홈으로 파고들며 그대로 경기가 끝났다. MBC는 9회말에만 5점을 뽑아내며 4대 8로 뒤지던 경기를 뒤집었다. 이날 MBC 선발 투수 오영일은 누구보다 기쁘게 뛰어나와 정영기를 끌어안았다. 박기철 기록원은 기록지 위 오영일의 이름 앞에 ⓦ를 그려 넣었다.

경기가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록 잠실구장 앞 포장마차는 북적였다. 사실 9회초가 끝나자 팬들은 벌써 하나 둘 자리를 떠난 터였다. 드물게 경기장을 차지하고 있던 여고생들은 말했다. "오늘 경기는 좀 그랬지만, 그래도 영일이 오빠, 정말 잘 생기지 않았냐?" 아저씨 팬들은 애꿎게도 여학생 팬들을 나무라며 경기장을 빠져 나갔다. "기집애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야구를 얼굴로 하냐? 에이, 퉤."

인하대를 졸업하고 MBC에 입단한 신인 오영일은 이날 데뷔 이후 첫 선발 임무를 맡았다. 1회부터 한 점을 내주며 불안하게 시작했고, 2회에는 아예 타자 일순하며 6점이나 내줬다. 오영일은 마운드 위에서 백인천 감독 눈치를 살폈지만 백 감독은 별 반응이 없었다. 3회에도 마운드에 오른 오영일은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하며 안정을 되찾았다. 9회 마지막 타자 김용철을 3루 땅볼로 잡고 내려갈 때까지 추가 실점은 8회 수비수 실책으로 내준 한 점뿐이었다.

9회말 선두타자 나선 신언호가 중전 안타를 치고 나갔을 때도 오영일은 조용히 선배들 몫까지 짐을 꾸리고 있었다. 다음 타자 김재박이 좌월 투런을 쏘아 올리자 팬 몇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그라운드로 향했다. 8대 6 두 점 차였다. 3번 타자 김용운은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지만 6회부터 경기에 투입된 최정우가 안타를 날리며 1사 1루.

롯데 박영길 감독은 이윤섭 대신 이진우를 마운드에 세웠다. MBC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광은, 이종도의 연속 2루타로 8대 8 동점을 만들었다. 어느덧 군데군데 담배를 피워 문 채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이 보였다. 박 감독은 다시 김문희로 투수를 바꿨다. 김문희는 김정수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 송영운을 고의사구로 거르면서 정영기를 선택했다. 결국 정영기가 끝내기 안타를 때려내면서 오영일은 8점이나 내주고도 완투승을 기록했다. 프로 첫 번째 승리였다.

오영일의 행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듬해 5월 1일 전주구장에서 오영일은 9이닝 동안 해태 타선에 9점을 내줬지만 14점을 뽑아낸 타선 덕분에 또 한 번 완투승을 기록했다. 이번엔 9실점 모두 자책점이었다. 이 경기는 24년이 지나도록 역대 최다 실점 완투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오열일은 1990년 은퇴할 때까지 완투 33번을 포함해 62승을 거뒀다. LG에서 투수 코치를 맡기도 했던 오영일은 2007년까지 현대 유니콘스 2군에서 투수 코치를 지낸 뒤 팀이 히어로즈로 바뀌면서 옷을 벗었다.오 전 코치 아들 오동환은 2008년 신인드래프트 때 LG가 지명했지만 현재 연세대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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