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김시진, 2009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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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솔직히 그 '양반 기질'이 싫었다.

우리 1루 주자는 분명 정당한 슬라이딩을 했다. 상대 유격수가 스파이크에 찍혔지만 그건 우리 선수 잘못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기에 이기고도 감독은 "상대 선수가 다쳤는데 인터뷰를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면서 자리를 떴다.

물론 100% 진심은 아니었겠지만 (우리 팀은 이미 4강에서 멀어졌으니 다른 팀을) '돕겠다'고 말하는 것도 싫었다.

'사람 좋으면 꼴찌'라는 말은 야구 판에서 나왔다.

현대유니콘스 제2대 감독 김시진은 사람이 '너무 좋았다.'

'승부사 김시진' 그런 표현이 너무 듣고 싶던 나날이었다.

김시진 감독은 결국 그 해 말 팀이 히어로즈로 바뀌면서 지휘봉을 이광한 감독에 넘겼다.


# 1981년 또 1984년

1981년 실업야구 한국시리즈 1차전.

최동원이 실업팀 롯데 선발로 마운드에 올랐다. 경리단(군인 팀) 선발은 김시진이었다. 두 투수의 완투 대결은 3 대 0 김시진의 완봉승으로 마무리됐다.

김시진은 2승 1무로 앞선 4차전 다시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나섰다. 상대는 1차전 9이닝, 2차전 8이닝, 3차전 7이닝을 던진 최동원.

7회까지 3 대 1로 경리단이 앞서 있었다. 2이닝만 더 버티면 경리단이 한국시리즈 패권을 차지할 수 있던 그 순간.

김시진은 8회 2아웃을 잡은 뒤 연거푸 볼넷을 내주며 흔들렸다. 권영호가 마운드를 이어 받았지만 롯데는 6득점을 뽐내내면서 결국 경기를 뒤집었다.

1루수로 물러나 있던 최동원은 다시 마운드에 올라 경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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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은 5차전 다시 구원 투수로 3이닝을 소화했고 시리즈는 2승 1무 2패 동률이 됐다.

양팀은 당연하다는 듯 6차전 선발로 각각 김시진과 최동원을 내세웠다.

김시진은 6점을 내주며 무너졌고, 최동원도 4점을 내줬지만 9회까지 마운드를 지켰다.

챔피언 트로피는 물론 MVP 역시 모든 게임에 등판한 최동원 차지였다.

그리고 3년 뒤.

최동원은 또 한 번 김시진을 무참이 짓밟았다.

7차전 중 5게임에 등판해 4승을 거둔 최동원이 '부산의 아들'이 되는 순간 시리즈 2패 투수 김시진은 남몰래 그라운드를 빠져 나왔다.


#1976년

제10회 대통령배 결승전. 대구상고 김시진은 8회까지 군산상고 타선을 1안타로 꽁꽁 묶었다.

9회초 1아웃. 김시진은 김형종에게 기분 나쁜 3루타를 내줬다.

스퀴즈를 의식한 김시진은 공을 뺐고, 이만수가 공을 놓치는 사이 3루 주자가 홈으로 쇄도했다.

0 대 1, 점수를 내 준 김시진은 마운드에 주저앉아 어깨를 들썩였다.

대구상고는 9회말 안타와 사구를 하나 씩 얻었지만 득점을 올리는 데는 실패했다.

경기가 끝난 뒤 진행 팀은 김시진을 우수 투수상 수상자로 호명했지만, 그는 한 동안 덕아웃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사람들은 수근댔다. "김시진이 큰 경기에 약한가?"

맞대결 상대였던 군산상고 김용남이 결승전에서 완봉승을 거둔 공로로 MVP를 차지했다.

최동원은 그해 봉황기 결승전에서 김용남을 상대로 탈삼진 20개를 기록하며 우승기를 거머쥐었다.

1976년 고교 야구의 투수 '트로이카'는 누가 뭐래도 최동원, 김용남, 김시진이었지만 그 해 청소년대표팀 명단에 김시진의 이름은 없었다.

우리나라가 첫 세계 정상에 오른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때 김시진도 대표팀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들도 그리 많지 않다.


# 1987년

김수경은 2007년 8월 2일 수원에서 롯데를 맞아 6⅔이닝 4피안타 1실점을 기록하며 100승 투수가 됐다.

리포터가 수제자의 재기 성공에 대해 묻자 김시진 감독은 "내가 프로 첫 번째 100승 투수"라고 동문서답하며 쑥tm럽게 웃었다.

1987년 개천철 OB와 치른 잠실 원정 경기.

김시진은 6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은 뒤 7회부터 마운드를 김성길에게 넘겼다.

최종 스코어는 6-0, 삼성 승리. 시즌 23번째 승리였다.

김시진은 77승을 안고 1987 시즌을 시작했다. 평균자책은 3.21로 18위에 그쳤지만 등판 때마다 타선이 폭발했다.

75승으로 시작한 최동원은 14승에 그치며 최초 100승 투수 자리를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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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진은 경기가 끝난 뒤 "100승을 앞두고 잠을 설쳤다"면서 "이제는 한국시리즈에서 팀의 우승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18일 뒤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

김시진은 해태 이순철에게 볼넷을 내주며 경기를 시작했다.

이순철은 2루로 뛰었고 포수 이만수가 실책을 저지른 사이 3루에 안착했다.

외야로 날아간 공을 장효조가 더듬는 사이 이순철이 선취점을 올렸고 김성한도 살았다.

곧바로 터진 한대화의 두 점 홈런.

순식간에 3 대 0으로 점수 차가 벌어졌다.

삼성은 1, 2회 한 점씩 뽑으며 곧바로 추격전을 벌였고 김시진도 7회까지 무실점으로 버텼다.

그러나 8회 김성한에게 홈런을 내주면서 김시진은 주저앉고 말았다.

해태 김응용 감독은 "김시진 선발을 예상한 타순이 적중했다"고 승리를 자평했고, 삼성 박영길 감독도 "김시진의 구질과 볼 배합이 좋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김시진은 4차전에서도 또 한 번 패전 투수가 되면서 선동열의 우승을 지켜봐야 했다.

한국시리즈에서 7연속 패전. 1984년 한국시리즈 2패, 1986년 3패 그리고 1987년 또 다시 2패.

한국시리즈를 세 번 치르는 동안 김시진은 홈런도 6개나 내줬다.

한국시리즈 최다 연패, 최다 패전, 최다 피홈런의 주인공.

김시진은 1992년 롯데에서 유니폼을 벗을 때까지 결국 한국시리즈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정규 시즌 통산 성적은 124승 73패 16세이브, 평균자책 3.12.


# 2009년

이 자리에 무엇이 적힐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다.

김시진은 '거품이 낀' 2위 팀을 물려받아 초년 감독 시절을 보냈다. 최고가 되지 못하면 잘해야 제자리걸음인 팀. 이번에 맡은 팀은 전년도 7위였다.

히어로즈 팬의 한 사람으로서, 이것 하나 딱 부탁하고 싶다.

올해 감독으로 쌓은 승수가 본인 통산 승수만 넘어서면, 그것만으로도 '완벽한 성공'이라 부르겠다고.

그 어느 누가 올해 히어로즈를 맡았대도 김시진보다 잘하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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