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한국시리즈 3차전을 중계하면서, 박노준 해설 위원은 진루타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일억 번쯤 한 것 같습니다. 심지어, 홈런보다 소중한 진루타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는 비단 박 위원에게만 국한된 얘기는 아닙니다. 방송 3사의 해설위원 모두 누구를 막론하고 진루타를 강조, 또 강조합니다. 미국 캐스터진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소위 Productive Out을 너무도 사랑합니다. 정말 진루타가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브루마불 같은 보드 게임을 하나 만들어 보겠습니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A, B, C 세 개의 도시를 지나 다시 <시작>으로 들어오면 1점이 납니다. 하지만 주사위를 던져 그 둘의 합이 3의 배수가 나온 경우에만 정해진 규칙에 의해 말을 옮길 수 있고, 그 이외의 경우에는 말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말은 모두 네 개까지 쓸 수 있습니다. 한번의 턴(turn)에 3의 배수가 아닌 수가 세 번 나오면 주사위는 다른 플레이어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9번씩의 턴을 마치고 나면 게임은 끝나게 되고, 각각 득점한 점수에 따라 승패를 가르게 됩니다.

단 예외가 있습니다. 3의 배수가 아닌 숫자 가운데 더블, 그러니까 (1,1), (2,2), (4,4), (5,5)가 나온 경우에는 기회 한번은 잃지만 말을 한 칸 옮길 수가 있습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일부러 위의 네 가지 조합이 나오도록 주사위를 던지려고 노력하시겠습니까? 어차피 기회를 날릴 확률이 더 높으니, 저거라도 나와 주면 고맙지 하고 저 짝을 맞추기 위해 주사위를 던지시겠습니까? 아니면, 주사위를 던졌더니 우연찮게 저 패가 나와서 기회는 한번 잃었지만, 그래도 말을 한 칸 옮길 수 있게 됐으니 다행이야, 하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이 게임의 룰을 따르자면, 저는 후자처럼 생각할 것 같습니다. 결국 27번의 다른 조합이 나오면 더 이상 득점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말 테니까요.

눈치 채셨겠지만, 이는 야구의 비유입니다. 물론, 당연히, 야구라는 위대한 게임이 이대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위의 비유를 따르자면, 말이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느냐에 따라 주사위의 각 숫자들이 나올 확률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 게임을 할 때 상대편 팀은 가만히 제가 주사위 던지는 걸 지켜보고 있겠지만, 야구에서 상대팀은 끊임없이 저의 득점을 훼방 놓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하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 게임에선 주사위의 확률, 그러니까 1/36을 기준으로 움직이게 되지만, 실제 야구에선 각 선수에게 주어진 역할이 다르고 그에 따른 기대치도 다를 테니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달라지지 않는 게 있습니다. 아웃 카운트 27개를 모두 써버리고 나면, 특히 한번에 세 개를 써버리고 나면 더 이상 공격할 기회가 없다는 것 말입니다.

한 회에 아웃 카운트는 세 개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가장 이상적인 공격인 이 아웃카운트를 소모하지 않고 득점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그리고 너무도 상식적으로, 상대의 집요한 방해공작(?)이 계속되기 때문에 그런 일은 발생하기가 너무도 어렵습니다. 특히 서로 어느 정도 엇비슷한 수준을 가진 프로 무대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당연히, 아웃 카운트 소모를 최소한으로 하는 방식으로 공격에 임해야 합니다. 또한 주자를 진루시킬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을 때 되도록이면 한번에 많이 진루시키는 편이 낫습니다. 그래야 말이 3루에 있을 때, '최악의 최선'으로서 진루타가 나온 경우에도 득점에 성공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물론 가장 좋은 건, 주자를 한번에 홈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홈런에 열광하는 까닭입니다. 원하신다면, 저는 원년부터 올해까지 정규 시즌 홈런왕의 명단을 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한 시즌에 가장 많은 진루타를 기록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알 수도 없을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1점차로 뒤지거나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홈런은 진루타보다 가치가 떨어질까요? 물론 2아웃이라 불가능하긴 했지만, 한국 시리즈 3차전 8회 양준혁 선수 타석, 만약 1사 상황이었다면 홈런보다 2주 주자를 3루로 보내는 진루타를 때린 게 더 값어치가 높다고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럼 그 선수가 조동찬 선수였다면, 김재걸 선수였다면, 김종훈 선수였다면 달라질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당연히 홈런이 낫고, 3루타가 낫고, 2루타가 낫고, 단타가 낫습니다. 심지어 볼넷이 낫고, 몸에 맞는 볼이 낫습니다.

삼성이야 어차피 1점차로 이기고 있었으니 그렇다고 치겠습니다. 그럼 두산의 6회말 공격을 한번 보겠습니다. 선두 타자 전상열 선수 2루타를 때립니다. 그리고 이어진 최경환 선수 타석. 진루타를 때려내며 주자를 3루로 보내는 데 성공합니다. 당연히 아웃 카운트는 하나 늘었습니다. 그리고 김동주, 홍성흔 선수 모두 '진루타'를 때려내지 못해 전상열 선수를 홈으로 불러들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설명일까요? 왜 최경환 선수의 진루타에 대해 박 위원은 '홈런보다도 소중한 진루타'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개인적으로 참 의문입니다.

이랬더라면 어땠을까요? 최경환 선수가 홈런을 칩니다. 경기는 2:1 역전입니다. 그리고 무사에 김동주 선수부터 다시 공격 찬스가 이어집니다. 최경환 선수가 3루타를 칩니다. 1:1 동점에, 중심 타선을 뒤에 두고 주자 3루의 찬스가 다시 이어집니다. 최경환 선수가 2루타를 칩니다. 1:1 동점에, 중심 타선을 뒤에 두고 스코어링 포지션에 위치합니다. 최경환 선수가 단타를 때려냅니다. 1:1 동점에, 발빠른 주자가 1루에 나가 있다는 위협을 상대 배터리에게 안기가 됩니다. 최경환 선수가 볼넷으로 걸어 나갑니다. 스코어링 포지션에 한명, 역시나 발 빠른 주자 1루, 타석엔 팀의 간판 김동주 선수. 상대가 겁먹지 않을까요?

임마, 아웃 당할 확률이 훨씬 높은데 그건 감안 안 하니? 그렇습니다. 당연히 아웃 당할 확률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아웃 당하지 않는 능력이 더 높게 평가되어야 합니다. 확률이 더 낮고, 그 결과가 팀에 공헌하는 바가 더 큰데 그 가치가 진루타보다 낮을 이유가 어디에 있나요? 어떻게 진루타가 홈런보다 나을 수 있습니까? 묻겠습니다. 그래서 득점에 성공했나요? 홈런이 터졌더라면 달랑 2점으로 그치고 말 공격이, 넉점 다섯점까지 이어졌나요? 아닙니다. 진루타 역시 후속타자가 주자를 불러들이지 못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아웃 카운트를 소모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주자가 1루에 있을 땐 병살의 위협을 제거해서 잘했다고 칭찬합니다. 1.94%의 확률 때문에 말입니다. 이는 안타가 나올 확률보다도 떨어지는 비율입니다. 게다가 99년에 톰 루안이 발표한 주자와 아웃 카운트별 '한 점이라도 뽑을 수 있는 확률'에 의하면 무사 1루에서의 기대치는 .424, 1사 2루에서의 기대치는 .400입니다. 단 한점이 필요하다고 해도 진루타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는 번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번트를 댄다면 병살의 위협은 훨씬 줄어들게 됩니다. 번트를 지시하는 게 훨씬 안전한 선택입니다.

2루 주자를 3루로 보내는 데 성공했을 땐 말합니다. 폭투나 포일, 혹은 희생플라이를 염두에 두었을 때 훌륭한 플레이였다고 말입니다. 희생플라이는 전체 타석에서 1%(0.66%)도 발생하지 않는 케이스입니다. 상대 투수에게서 안타를 뽑아낼 수 없으니 희생 플라이를 노려야 한다구요? 언제부터 강투수들이 희생플라이를 손쉽게 허용하는 투수가 된 겁니까? 폭투요? 전체 타석에서 0.94%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폭투라고 언제든 실점으로 허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포일 비율까지 말씀드려야 할까요? 내야 땅볼로도 득점할 수 있다구요? 승부는 박빙, 주자는 3루, 이 상황에서 언제부터 내야수들이 제자리를 지키기 시작했답니까? 줄 점수는 주고 아웃 카운트를 잡는 건, 그 1점보다 아웃 카운트를 소모시키는 게 더 의미가 크기 때문이 아닐까요? 전진 수비하는 내야수 사이를 뚫고 안타를 기록했다구요? 그건 안타지, 진루타가 아닙니다.

이 모든 까닭은 단순합니다. 꼭 진루타를 치고야 말테야, 이런 생각으로 타석에 임하는 선수가 있을까요? '하다못해' 진루타라도 하나 쳐야지, 이게 좀더 상식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위에서도 한번 언급한 표현입니다만, '최악의 최선'으로 진루타가 존재하는 것이지, 그게 절대 홈런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저런 발언을 생각해 냈는지 정말 기가 찰 지경입니다. 네, 진루타라도 쳐주는 게 그렇지 못한 것보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절대 홈런보다 소중할 수는 없습니다. 굳이 한번 소중한 순서를 늘어놓자면 ;

홈런 - 3루타 - 2루타 - 단타 - 사사구 - 적실 - 진루타 - 삼진 - 기타 아웃 - 병살 - 삼중살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가해 봅니다. 그러니까 진루타를 치는 건, 상대의 실책보다도 못한 요소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사실 무사 2루(.608)보다 1사 3루(.651)에서 한점이라도 뽑을 확률은 더 높아집니다. 하지만 홈런을 치게 되면, 이미 2점을 얻고 다시 한점이라도 뽑을 확률 .261에서 공격을 시작하게 됩니다. 홈런보다 더 소중한 진루타라? 박 위원님, '오바'가 도를 넘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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