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얻는 것보다 어려운 건 버릴 줄 아는 것이다.’ 저희 사무실 화장실 소변기 앞에는 이런 글귀가 붙어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든, 소변을 볼 때마다 저 문장의 의미를 되새기고는 합니다. 아직 무엇 하나 제대로 얻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철없고 객기만 넘치는 제 젊은 열정에, 철인(哲人)의 잠언은 아직 먼 나라의 얘기처럼만 들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처음 저 글귀를 본 순간, 어디서든 흔히 한두 번쯤 들어봤을 법한, 저 문장을 보는 처음으로 맞닥뜨린 순간, 제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사람은 칼 립켄 주니어였습니다.



실력과 성실함이 겸비되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기록을 보유한 사람. 영원히 깨질 것 같지 않던 철인(鐵人) 루 게릭의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뛰어 넘은 사람. 그마저 모자라, 일본 프로야구 기록까지 뛰어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쉬지 않고, 야구 경기에 출장한 사람. 그리고도 너무도 평범한, 그러면서 가슴 뭉클한 한마디. ‘매일 야구를 할 수 있다는데, 왜 안 하고 싶겠어요?’

그리고 1998년 9월 20일. 그는 1982년 5월 30일부터 이어온 자신의 연속 경기 출장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I think the time is right." 2,632 경기. 햇수로 16년만에 그는 스스로 감독에게 부탁, 자신을 로스터에서 제외합니다. 선발 로스터에서 그의 이름이 제외된 걸 전광판을 통해 확인한 팬들, 일어서 기립 박수를 치기 시작하고, 칼 립켄 주니어는 덕아웃 밖으로 나와 모자를 벗어 팬들의 커튼콜에 응답합니다.

“저는 평범한 타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더러 정말 멋진 수비였다고들 말하더라구요. 그래서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배 선수가 지나가며 흘린 평가에, 자신의 현재 모습을 돌아볼 줄 알았던 멋진 선수.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누구보다 엄격했던 신사. 그는 그렇게, 어쩌면 자기 커리어 사상 가장 빛나는 기록을, 자신의 의지로 중단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자연스레 그의 은퇴를 예감했습니다. 아, 이번 시즌이 끝나면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겠구나. 하지만 그는 그 다음날부터 다시 경기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99 시즌 86경기에 출장, .340의 타율에 18홈런을 기록하며, 자신의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습니다. '00 시즌 83경기, .256 15홈런.


칼 립켄 주니어 마지막 올스타전

그리고 2001년. 시즌 시작과 함께 자신은 시즌 종료후 은퇴할 것임을 천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해 자신의 19번째 올스타 경기에 출전하게 됩니다. 팬들은 엄청난 기록을 선보이던 글로스 대신 마지막예우를 다하기 위해 선발 3루수로 립켄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유격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에이로드는 억지로 그를 유격수 자리로 내몹니다. 못 이기는 척 차지한 유격수 자리. 1983년과 1992년 골드 글러브를 차지했던 그 자리. 유격수로 출전하면서도 무려 431개의 홈런을 뽑아냈던 그 자리. 아마, 선수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끝끝내 지켜내고 싶었을 그 자리. 그는 명예롭게 그 자리에서, 최고의 별들과 함께 세이프코 필드의 여름밤을 빛내고 있었습니다.

오늘, 저는 저의 바람대로, 그리고 예상대로, 은퇴를 선언한 유격수 출신 선수가 올스타전에 나서게 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야구판에서 행정을 한다는 인간들이 뇌는 없을지 몰라도, 눈이랑 귀는 있구나, 하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2001 MLB 올스타전에서 맥과이어, 토니 그윈이 칼 립켄 주니어와 함께 받았던 그 영예로움을 꾸며줄 거라고까지 기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거기까지 바라기에 우리는, 아니 행정을 한다는 인간들은 영웅을 너무 소홀히 한다는 걸 너무도 자주, 여러 번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저 노장 들러리가 아닌, 영웅의 영웅다운 퇴장을 바라는 게 지나친 욕심이 된다는 걸 너무도 자주 느꼈기 때문입니다.



MLB 사무국은 칼 립켄 주니어의 소속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2001 시즌 마지막 홈 경기 일정을 토요일로 조정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습니다. 미국 대통령조차 친히 비디오 메시지를 보내, 미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자녀를 칼 립켄 주니어처럼 키우고 싶어할 거라는 멘트를 전했습니다. 제가 야구를 잘 몰라서 그런가 봅니다. 한 리그의 통산 홈런 1위 기록이, 연속 출장 기록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겁니까? 겨우 올스타전에 초대됐다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어야 하는 게 이 나라 프로리그의 현실이란 말입니까?



올해 4월, NBA 레지 밀러의 마지막 홈경기처럼 우리는 정말 못합니까? 경기장을 가득 매운 Thank you, Reggie 피켓. One more year, One more year를 외치며 울먹이는 팬들. 디트로이트와의 플레이오프 7차전, 승부는 이미 디트로이트로 기운 다음이었습니다. 경기 종료를 얼마 앞두지 않은 상황, 레지 밀러는 생애 마지막으로 교체가 되어 경기장 밖으로 나옵니다. 디트로이트의 래리 브라운 감독, 승부와 상관없는 타임아웃을 신청합니다. 그리고는 자기부터 박수를 치기 시작합니다. 팬들과 상대팀 선수들, 그리고 동료들 모두 끌어안고 울먹이며 영웅의 마지막을 안타까워합니다. 제가 스포츠를 잘 몰라서 그런가 봅니다. 통산 홈런 1위 기록이, 통산 3점슛 1위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겁니까?



우리는 왜 못합니까? 전 하고 싶습니다. 오라는 대학 팀이 없어, 월봉 40만원에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방망이를 휘두르고 또 휘두르던 그의 굳은 의지를 꼭 영웅의 의지로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너무 지나친 연습으로 팔꿈치가 휘어 버린 그의 팔을 꼭 영웅의 팔로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자기 등번호만큼 홈런을 치겠다며 35번을 택했던, 모두가 비웃을 때 묵묵히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했던, 그의 열정과 끈기를 꼭 영웅의 열정과 끈기로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후배 투수 김원형을 향해 날아가는 강습 타구를 날리고, 1루가 아닌 마운드로 뛰어가던 그의 마음 씀씀이를 꼭 영웅의 마음 씀씀이로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장종훈 선배보다 뛰어난 타자가 되겠다며 숫자 하나를 늘려 36번을 달았던 이승엽 선수, 그 35번을 영원한 영웅의 등번호로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아빠가 대단한 야구 선수라는 걸 알고 있냐는 기자의 물음이 생각납니다. 사실 전 굉장히 무례한 기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촌놈’ 특유의 답변. ‘중학생이 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기다리겠다.’던 겸손한 그분의 말씀. 아, 저는 성질이 급해서 못 참겠습니다. 꼭 현우, 현준이가 아빠가 얼마나 대단한 야구 선수인지, 너무 늦기 전에 알려주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습니다.

우리, 정말 알려주지 못하는 겁니까? 이렇게, 우리의 영웅을, 타고는 재능과 천재성이 아닌, 노력과 열정과 끈기로 스스로 만들어낸 우리의 영웅을, 그 따듯하고 촌스러운 소박한 마음의 영웅을, 이렇게 보내야 합니까? 우리가 영웅에게서 받았던 그 감동을, 단 한번이라도 영웅에게 되돌려줄 수는 없는 겁니까? 팬 여러분, 올스타전 가실 때, 제발 피켓 하나씩만이라도 꼭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청주 구장에서, 단 한타석에도 들어서지 않더라도, 꼭 그가 마지막으로 뛰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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