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요사이 <짠물 야구>라는 사이트에서 신나게 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처음으로 응원했던 팀이고, 아직 단 한번도 바뀌지 않은 그 팀에 대한 애정, 믿음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프로팀이든, 대학팀이든, 그것이 어떤 종목이든 제가 처음으로 응원해 본 팀은 대한민국 축구 국가 대표팀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각종 만화가 동심을 호도한 탓이라고 보는데요, 어릴 적엔 우리나라 축구 수준이 세계 최고라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제 세대를 기준으로 하자면, 김주성 · 최순호 · 황보관 선수들은 정말 세계적인 공격진이었고, 황선홍 · 홍명보 선수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차세대 스타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도 굳건히 어린 아이의 마음을 철저하게 짓밟아 버렸습니다. 그건, 삼국지를 끝까지 읽지 않고 당연히 유비가 통일할 거라고 생각했다가 진실을 알게 됐을 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만년 꼴찌여도 좋았던 팀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좋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팀의 이름은 바로 태평양 돌핀스입니다. 어릴 적 사진을 보면, 청보 핀토스 어린이 회원복을 입고 있는 제 모습이 보입니다만, 그 시절은 전혀 기억나지가 않습니다. 제 기억 속에, 제가 처음으로 야구장을 찾아 목이 터져라 응원했던 팀은, 그리고 순전히 선수들 타율, 방어율을 옮겨 놓고 싶어서 LOTUS 1-2-3을 배우게 만들었던 바로 그 팀은, 바로 태평양 돌핀스였습니다. 그리고 팀 이름이 현대로 바뀌었지만, 그래서 선뜻 좋아하는 팀이 현대라고 어디 가서 밝히는 느낌이 태평양 시절과는 전혀 달라졌지만, 사실 제가 가장 좋아했던 팀은 바로 태평양 돌핀스였습니다. 현대는 늘 해태 팬 친구를 부러워하게 만들었던 우승의 기쁨을 네 차례나 맛보게 해주었지만, 그래도 사실 저는 영원히 태평양 팬이고 싶습니다.

태어나서 야구장을 처음 찾았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제법 어둑한 땅거미가 깔리고, 경기장 밖에는 이미 여기저기 좌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미 한잔씩 하고 경기장에 들어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비좁은 주차장을 돌고 돌아 자동차를 주차하고, 긴 줄을 기다리며 혹시 매진되지나 않았을까 조마한 마음에 매표소 앞에 섭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받아든 어린이용 야구표. 500원이었을 겁니다. 아버지 뒤를 따라 혹시라도 아버지를 놓칠까 북적대는 사람들 틈으로 바짝 아버지 뒤에 붙어 섭니다. 그리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 마침내 조명탑에 불빛이 눈에 들어옵니다. 시야를 압도하는 믿기지 않을 만큼 환한 다이아몬드. 경기가 무르익을수록, 하얀 달빛 아래, 야구공은 더더욱 하얗게, 아름답게 뻗어 나갑니다. 아, 내가 정말 야구장에 있구나. 아, 여기가 늘 TV로만 보던 그곳이구나. 저 선수들이 바로 그 선수들이구나.

누가 뭐래도 태평양은 투수 왕국이었습니다. 최창호 선수는 팀에 삼진이 필요하면 언제든 마운드에 오르는 최고의 삼진 머신이었고, (그 투구폼을 자주 흉내내곤 했습니다.) 경기 초· 중· 후반을 가리지 않고 등판하는 박정현 선수는 제게 독고탁의 화신이었습니다. (사실 야구와 거리가 멀게 생긴 외모라고 생각했습니다.) 경기 운영의 묘미를 아는, 그래서 승리를 챙길 줄 아는 멋진 좌완 투수 양상문. (순전히 팬북에 적힌 좌완 최다승이라는 문구 때문에 ^^;) 선발이든 마무리든 국내 최정상급의 구위를 보여주는, 그러면서도 다 이겼다고 생각하는 경기에선 가끔 혈압을 올려주던 정명원 선수. (당시 처음으로 KBS에서 위성 방송을 시작할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LG전에서 다 이긴 경기에 올라와 보여준 불쇼는 정말 ^^;)부상 3총사가 빠졌을 때 홀로 마운드를 이끌었던, 그리고 결국 자기도 부상자의 대열에 합류했던 김홍집 선수.(어디선가 듣기에 중국에 계신다던가요?) 가내영, 박은진, 안병원 선수의 이름도 떠오릅니다.

또 사실 빈약했지만, 어릴 적 제 머릿속의 태평양 타선은 달랐습니다. KK타선은 공포의 이미지 그 자체였습니다. 김동기 선수는 투수 리드 역시 으뜸인 건 기본, 필요할 땐 꼭 한방씩 터뜨리는 방망이까지 굉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포수 4번 타자의 이미지는 제게는 이만수 선수보다 사실 김동기 선수가 먼저였습니다.) 김경기 선수는 제게 대한민국 최고의 홈런 타자였습니다. 다만, 늘 부상과 인천 구장의 높은 철제 펜스 때문에 홈런수가 좀 적은 거라는 나름의 이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천 구장 펜스가 처음부터 높았던 건 아닌가요? ^^; 그리고 김경기 선수 부상 중일 때 사인 받은 기억이 나는 것도 한 몫 하나 봅니다.) 윤덕규 선수는 언제라도 3할을 칠 수 있는 방망이 실력을 갖췄다고 믿었습니다. 신문에 때로는 하득인/하득린이라고 표기되던 그 선수는 마치 좌완 투수를 상대로는 언제든 홈런을 펑펑 쳐줄 것 같은 이미지였습니다.(갑작스런 은퇴 결정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기꺼이 하이바(?)에 공을 맞고 1루로 걸어가던 김인호 선수를 어떻게 있겠습니까? (99년인가에 김인호 선수 댁에 한번 갔었는데, 귀여운 아이들도 생각나네요 ^^)

늘 구멍 난 자리이던 내야 수비진을 채워준 선수들도 좋았습니다. 염경엽 선수는 타율은 안 좋지만, 상대 투수를 언제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타자라는 이미지였고. (이건 순전히 어느 인터뷰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타자로 박철순 선수가 염 선수를 꼽았기 때문입니다.) 김성갑 / 김용국의 2 · 3루 수비는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철옹성이라 믿었습니다. 손차훈 / 권준헌의 백업 역시 다른 팀에 가면 주전은 거저먹지만, 저 어마어마한 수비진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하는 거라고 믿었습니다. (94년 당시, 정동진 감독은 6회말이 되면, 유독 2 · 3루 자리만 백업 멤버로 교체하는 로스터를 자주 썼던 걸러 기억합니다. 순전히 그것 때문에 저런 이미지를 갖게 됐나 봅니다. 94년엔 별로 어리지도 않았는데 ㅡ_ㅡ)

하드볼 시리즈,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계시죠? 거기 Pacific Dolphins라는 팀을 만들어 K.K Kim 선수를 무지막지한 괴물 타자로 키우던 생각이 어렴풋이 납니다. 신문에 실린 박스 스코어를 보며, 서툰 영어 실력으로 선수들 이름을 쳐놓고, 좌 · 우 타자조차 제대로 알지 못해 염경엽 선수가 스위치였고 ^^; 외국에는 언더 핸드 비율이 현저히 적어 게임에 빠진 것도 모른 채, 게임을 이 따위로 만들면 안 되지, 하면서 언더 핸드 투구폼으로 바꿀 수 없는 걸 원망했던 것 같습니다. 도트로 점을 찍어 원하는 아이콘을 팀 로고로 쓸 수도 있었는데 생뚱맞게 PD 이런 모양만 열심히 그렸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언제나 시즌 우승은 우리 팀 PD의 몫이었습니다. K.K Kim 선수와 D.K Kim 선수는 모두 시즌 홈런 40개를 넘겼던 걸로 기억합니다. D.K Yoon 선수는 3할 7-8푼은 쳤겠죠 ^^;

하지만 현실 속의 태평양은 그런 팀이 아니었습니다. 팀 순위는 부끄럽게 적지 않아도 될 정도였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뭘 그렇게 후진 팀을 응원하냐, 는 소리를 적잖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인천이 아닌, 수원에 사는 저로서는, 단지 홈팀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 하나만으로도 태평양이 좋았습니다. 1년에 15게임 남짓 찾아오는 전 경기를 한번도 빼놓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그건 팀이 현대로 바뀐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500원이던 표 값은 1500원으로, 어느 날에는 다시 3,000원으로 올랐습니다. 처음 청소년 요금을 내던 날, 저는 혼자 야구장을 찾았습니다. 처음 성인 요금을 내던 날도, 저는 혼자 야구장을 찾았습니다. 어디 혼자 돌아다니기 그렇게 싫어하는 성격이면서도, 이상하게 그런 날은 혼자 야구장에서 내가 이만큼 자랐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혼자 빽빽하게 기록을 해가며 수원 구장에 제가 언제나 앉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 청소년 요금을 내던 날에는 아마 졌을 겁니다. (이사하다 보니 기록지를 잃어버려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어 혼자 찾은 야구장에선 이겼습니다. 그때는 이미 팀이 현대인지도 한참 된 다음이었으니까요. 이미 우승도 해본 팀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저는 그 팀과 함께 나이를 먹었고, 보조 홈구장에 지나지 않던 수원에, 제가 사는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넌 어느 팀 좋아해? 응, 현대야, 하고 말하지만, 여전히 그 촌스럽던 붉은 유니폼을 굳이 저는 아이콘으로 택했습니다.

1999년엔 정말 야구장 열심히 돌아다녔습니다. 수원 구장은 물론이고, 잠실, 인천 구장, 대전, 대구, 청주, 사직, 무등 경기장까지. 그리고 현대가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던 2000년, 제 기억이 맞다면, 잠실과 수원에서 하는 현대의 모든 경기를 딱 두 번 빼고 다 갔습니다. 야구의 야자도 모르던 제 여자친구, 넌 다른 건 다 소극적인데 야구장 가자고 할 때만 아주 신나더라, 라고 말할 지경이었습니다. (그 친구 저랑 헤어지면서, 다시는 야구 좋아하는 남자랑은 안 사귄다고 이를 갈았다고 합니다 ㅋ) 우승할 때도 당연히 야구장에 있었습니다.

그때 그 여자친구가 제게 자주 묻던 말이 있습니다. 팀이라는 게 뭐야? A팀이랑, B팀이랑 선수를 통째로 바꾸면 상대팀이던 팀을 응원하는 거야?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한결 같이 답합니다. 제 오른쪽 귀엔 꿰맨 자국이 있습니다. 귀를 꼬매는 건 익숙한 경험이 아니죠. 그때 전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있었습니다. 기계로 대충 밀고, 가위로 잔가지를 치고 있던 그때, 정명원 선수가 포스트 시즌 사상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습니다. 전 순간 벌떡 일어났고, 그때 가위에 귀가 찢겼습니다. 빨리 병원으로 보내려고 구급차까지 도착했지만, 전 좀더 그 순간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조금만 더 찢어졌다면, 귀 윗부분을 완전히 잘라내야 했을 거라는 의사분의 말씀에도 저는 계속 미친 듯이 웃기만 했습니다. 야, 넌 아무리 어리다지만 그렇게 철이 없냐? 귀가 찢어진 게 그렇게 신나? 전 아무 말없이 계속 웃었습니다. 제게 태평양의 포스트 시즌은 그런 의미였습니다.

저는 수원 구장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 단지에 삽니다. 그 전에 살던 곳에서 이사를 하려고 했을 무렵, 몇몇 후보지가 있었습니다. 이 아파트 단지를 선택하게 된 건, 순전히 야구에 미친 저희 집 3부자 덕분입니다. 집에 있다가도, 전광판을 보고 7회가 되면, 슬리퍼 차림으로 슬슬 캔맥주 하나 사서 외야에 앉아서 야구를 보다가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제는 예전 같은 흥이 나질 않습니다. 아니, 코 앞에 있는데도 99년 2000년보다도 훨씬 야구장을 찾질 않습니다.

이제는 너무 잘하는 데 익숙해진 모양입니다. 현대는, 우승을 못하면 이상한 이미지를 갖게 됐습니다. 꼴찌할 때도 그렇게 목이 터져라 응원하던, 고릴라 아저씨 기억하십니까? 후레이 후레이 김경기. 그리고 쉴새없이 욕지거리를 퍼부으시던 그 분. 그 분 별명은 잘 기억이 ^^; 요즘에도 수원 구장에는 늘 같은 자리를 지키는 분들이 계신다는 것 압니다. 하지만, 예전만큼 꼼꼼하게 그분들을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7위에 자리 잡고 있는 현대에 대해 얘기하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인천 팀은 아니고, 그렇다고 수원 팀은 아직까지 더더욱 아니지만 말입니다. 예전엔 그래도 참 신이 났는데, 이제는 기운이 많이 빠집니다. 7위가, 8위가 더 익숙했던 그 시절이 문득 더 그리워집니다. 이번엔, 왼쪽 귀마저 내어 줄 테니, 다시 한번 그런 시절이 오면 좋겠습니다. 꼴지여도 목청껏 응원할 수 있는 그런 날.

야구를 안 보면 안 봤지, 응원하는 팀은 못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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