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야구팬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감독을 비난하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니콘스 팬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달랐다.

유니콘스 팬들은 김재박 감독을 비난하지 않았다.

모두가 김 감독의 '번트 만능주의'를 비난할 때도 현대 팬들은 "일단 우리부터 꺾고 이야기하라니까"하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번트를 '죄악'으로 여기는 세이버메트리션들조차 "김재박 감독의 번트는 다르다"는 주장을 펼칠 정도였다. 대표팀 선정을 놓고 말이 많던 2006년에도 유니콘스 팬들은 김 감독 편이었다.

물론 김 감독에 대해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니콘스 팬들에게 있어 김 감독에 대한 비난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늘 비난은 조용히 사그라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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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진 감독이 배턴을 이어받은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양반'이라 불릴 그 분의 인격적인 면, 넓은 도량 등이 흠모의 대상이 됐을 뿐 정규 시즌 2위 팀을 이어 받아 고작 6위에 만족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모두가 어려운 팀 사정만 이야기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김시진 감독을 비난하는 글을 쓰기가 꺼려졌다. 몇 번이고 김 감독의 전략에 의문을 걸고 싶었지만 애써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양반이었으니까. 내가 보기에도 김시진 감독은 더할 나위 없는 덕장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 좋으면 꼴찌'라는 말이 처음 나온 곳은 야구 판이다.

작년 여름 전준호 선수가 2루로 슬라이딩해 들어가다 두산 이대수 선수와 충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 감독은 이날 경기에서도 이기고도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상대팀 선수가 다쳤는데 승장으로서 인터뷰를 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파울볼, MLB파크 같은 야구 팬 사이트에서는 '역시 대인배'라든지 '김시진 감독님 존경합니다' 같은 코멘트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태도가 너무도 싫었다. 그럼 전준호 선수가 잘못한 일인가?

분명 명백히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슬라이딩이었다. 스파이크에 이대수가 다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전준호가 잘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다쳤다는 결과보다는 그 과정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이대수만 걱정하고 있었다.

정당한 플레이 때문에 욕을 먹어야 했던 전준호는?

전준호 이야기가 나온 김에 롯데戰 이야기도 해보자. 롯데와의 대결을 앞두고 "져드리겠다"는 표현을 했던 건 어떤가? 덕분에 롯데 팬들 사이에서 "김 감독님 믿습니다"하는 코멘트 릴레이가 이어졌던 건?

물론 나도 김 감독이 정말 져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안다. 그리고 어떤 뉘앙스로 그런 말이 나왔는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한 팀의 감독이라면 매일 같이 그 팀의 승리를 기원하며 야구장을 찾고, 한 타이밍이라도 놓칠 새라 무선 인터넷을 통해 현재 상황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팬들을 위해서라도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다.

프로야구 팀의 감독이라는 자리는 야구판 전체의 '양반'으로 남으라고 주어지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기는 팀을 만들라고 주어진 자리가 바로 프로야구 팀 감독이기 때문이다.

물론 김 감독 덕분에 유니콘스는 '동정심'을 얻어낼 수 있었는지 모른다. 타 팀 팬들에게 '미움의 대상'에 가까운 김재박 감독이었다면 1200만 원 모금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유니콘스 역시 새 주인을 찾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광한 감독 내정설'이 들리는 이유 역시 김 감독 본인에게 있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누구보다 '최고의 투수 조련사'에서 '최고의 감독'으로 거듭나길 바랐다는 점에서 더더욱 안타깝다. 학창시절부터 프로생활에 이르기까지 늘 '큰 경기에 약하다'는 징크스를 달고 살았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그래도 나는 여전히 김 감독을 믿는다. 어찌됐든 김 감독은 '초짜'였다. '초짜'가 감당하기에 너무 힘든 시기였던 것 역시 사실이다. 이 힘든 시기를 김 감독은 너무 멋지게 돌파했다. 때문에 '양반'이 필요할 때 '양반' 시늉을 했던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김 감독은 얼마 전 원당에서 "나는 그렇다 치고, 나 때문에 옮긴 사람들이 걱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 치도 알 수 없는 자기 운명보다 먼저 '자기 사람'을 챙기는 '속 깊은 심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참 좋은 양반' 김시진 감독이 센테니얼 야구팀을 '이기는 팀'으로 만들어주길 절박하게 기도해 본다. '독종'이 필요할 때 김 감독이 어떻게 변할지 꼭 한번 보고 싶은 게 혼자만은 아닐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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