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심은하가 주연한 드라마 'M'이 전국을 강타하던 1994년 여름. 그 여름은 공중전화를 오래 쓴다고 다투다 살인사건이 벌어질 정도로 불쾌지수가 높았다. 사상 최고의 더위, 불볕, 그리고 짜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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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더위를 뚫고 인천 한 중학교 운동장에서 키 작은 꼬마가 부지런히 언더핸드 스로우로 공을 던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초등학생 아이가 장난친다고 생각할 정도로 꼬마는 너무도 형편없이 작았다. 하지만 이 꼬마는 당당한 중학교 3학년 야구부 선수였다. 작은 체구 때문에 이 꼬마가 투수로 성공하리라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반년이 지나 고등학생이 된 이후 꼬마는 더 이상 꼬마가 아니었다. 꼬마는 오버핸드로 공을 시원스레 뿌릴 수 있는 투수가 됐다. 꼬마는 어느덧 야구 명문 인천고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사람들은 안경잡이 꼬마 대신 인천고 김수경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높은 타점에서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던지는 투수 김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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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경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진가를 드러낸 건 1996년 봉황기 준결승전. 김수경은 현재 시애틀 매리너스 소속 백차승과 불꽃 튀는 투수전을 벌였다. 인천고 김대영이 끝내기 홈런을 터뜨렸고, 김수경은 당시 최고 투수 백차승을 꺾는 주인공이 됐다. 비록 정대현이 이끈 군상상고에 막혀 우승에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김수경이 분전하면서 가장 기뻐했던 건 현대 유니콘스였다. 이제 막 태평양을 인수한 현대에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위재영 같은 프랜차이즈 유망주였기 때문. 김수경은 고교 졸업과 동시에 계약금 2억1000만 원을 받고 현대와 계약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프로 새내기 김수경은 1998시즌 총 32게임에 나서 160이닝을 던져 12승 4패 2세이브를 기록했다. 탈삼진은 168개. 신인왕이 김수경에게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김수경의 맹활약은 포스트시즌에서도 계속됐다. 인천 야구에 첫 번째 한국 시리즈 트로피를 안긴 1998 한국 시리즈 6차전. 이 경기 승리 투수가 바로 선발 김수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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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첫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얻은 김수경, 소포모어 징크스 역시 그에게는 남의 일이었다. 평균자책점이 4.14점이 된 건 만족스러운 수준이 못 되지만 1999시즌은 유례없는 타고투저였다. 김수경은 184⅔이닝을 던져 탈삼진 184개를 솎아 내며 이 부분 1위를 차지했다.

이듬해 김수경은 생애 최고의 한 시즌을 맞이한다. 195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3.74, 탈삼진 172개. 이해 김수경이 거둔 18승은 같은 팀 소속 정민태, 임선동과 같은 공동 1위 기록이었다. 김재박 감독은 이 중 가장 어린 김수경을 한국 시리즈 1차전 선발로 내세운다. 이 셋 가운데 가장 믿을 만한 투수가 김수경이라고 판단한 것.

이 해 김수경은 시드니 올림픽 대표로 뽑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결과는 동메달. 그렇게 만 21살 김수경은 프로 무대에서 이미 40승을 거둔 투수가 됐고, 병역 문제까지 해결하면서 본격적인 승수 쌓기에 나설 것처럼 보였다. 김수경은 차세대 국가 대표 우완 에이스의 희망이었다.

하지만 3년 평균 180이닝을 던진 게 무리였나 보다. 특히 축족에 무리가 가는 투구 폼을 가진 투수라면 더더욱 그랬다. 2001시즌 김수경은 데뷔 이후 처음으로 100이닝을 던지는 데 실패했고 두자릿수 승리 기록 역시 끊기고 말았다. 김수경이 이후 3년간 솔리드한 선발 투수로 활약한 건 사실이지만 차세대 국가 대표 우완 에이스의 이미지는 희미해져 갔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탈삼진. 데뷔 이후 3년간 김수경은 9이닝당 평균 8.7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던 삼진 머신이었다. 하지만 2001년부터 이후 3년간 이 기록은 6.71로 나빠졌다. 제구도 문제였지만 구위 자체가 나빠진 것이다.

결국 구위를 끌어올리려고 투구 폼에 손을 댔지만 찾아오는 건 부상뿐이었다. 1군 마운드에서 공을 뿌릴 때도 예전 같은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모양새. 어느 틈엔가 김수경은 피해가는 투구를 하기에 급급한 투수가 되고 말았다. 김수경이라는 이름은 '믿음'이라는 낱말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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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FA 자격을 얻었지만 달리 오라는 팀도 없었다. 현대는 김수경에게 '1+2 계약'을 제시하며 눌러 앉혔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눈치였다. 무더위 속에서 공을 던지던 꼬마는 어느 덧 새신랑이 됐지만, 그에게는 그 해 무더위보다 지난 겨울의 추위가 더욱 답답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본인 스스로 "2군에 내려가지 않는 게 목표"였다고 밝힐 정도로 김수경의 이번 시즌 전망도 그리 밝은 편은 못 됐다. 실책이 끼긴 했지만 첫 등판에서 4이닝 6실점으로 무너진 투수라면 기대를 하긴 어려운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4월 20일 김수경은 7이닝 동안 탈삼진 11개를 기록하며 부활의 신호탄을 쐈다. 유독 선발 투수들에게 승운이 따르지 않는 게 올시즌 현대. 그래도 김수경은 차근차근 승수를 쌓아 나갔다. 행운과 함께 '믿음'이라는 낱말이 다시 김수경을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

결국 2일 롯데 전에서 시즌 10승 달성에 성공했다. 2004시즌 이후 3년 만에 10승, 프로통산 100번째 승리였다. 김수경이 역대 18번째 100승 투수가 되는 순간 모처럼 김수경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다승왕 트리오가 해체되고 현대가 자랑하는 신인왕 출신들이 모두 어디론가 숨어버린 현재, '투수왕국'이던 현대 유니콘스의 옛 영화(榮華)를 재현하고 있는 선수는 김수경뿐이다. 김수경의 미소가 현대 팬들에게는 각별한 의미인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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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경은 올해로 프로 10년차,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서른이 된다. 야구 속담에 투수가 어깨에서 힘을 빼는 데만 10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남자에게 서른이란 확실히 가슴에 책임감이 느껴지는 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통산 100승은 20대 김수경의 마침표였다.

과연 김수경의 30대는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물론 이 대답은 신(神)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지난 10년간 김수경을 응원해 온 한 사람으로서, 그의 30대에는 더 크고 빛나는 마침표가 찍히길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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