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KBO

대전의 에이스, 정민철


"어느 팀 응원하세요?"


이 질문에 곧잘 예상 밖의 대답이 돌아올 때가 있다. "태평양 돌핀스 팬입니다" 아니면 "야구는 역시 OB입니다" 같은 답변 말이다. 해태도 마찬가지고 드물게 쌍방울 레이더스가 자신의 응원팀이라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런 대답을 하는 양반이라고 해서 이제는 이들 팀이 사라진 지 오래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추억을 놓고 싶지 않은 게 바로 그네들 마음이다.


어떤 팀을 아주 열렬히 응원해 봤다는 것, 그건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이들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엄청난 의미를 지닌 경험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여전히 KIA 팬들은 이대진의 복귀에 노란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이종범의 은퇴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른 팀 팬에게 어느덧 놀림감이 된 정민태, 하지만 현대 팬들이 그를 향한 미련을 못 버리는 이유 역시 그야 말로 태평양의 추억을 되살려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잠실구장에서 MBC 청룡, OB 베어스 리트로 저지(Retro Jersey)를 보는 건 그리 신기한 광경이 못된다. 이 역시 마찬가지다.


한화 팬들에게 정민철이라는 이름 석 자의 의미가 남다른 것 또한 같은 이유다.


사실 빙그레의 에이스라면 정민철이 아닌 송진우, 한용덕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1992년 데뷔한 정민철이 빙그레 유니폼을 입고 뛴 건 딱 두 시즌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민철은 강호 '빙그레'가 약체 '한화'로 거듭나던 시기를 묵묵히 지켜준 '빙그레의 에이스'였다.



빙그레는 1985년 창단 후 이듬해인 1986 시즌부터 1군 리그에 참가했다.


1994 시즌 한화로 이름이 바뀔 때까지 이 팀 통산 성적은 493승 22무 427패. 같은 기간 동안 빙그레보다 많은 승수를 올린 팀은 전통의 강호 해태(554승)와 삼성(523승)뿐이었다.


특히 세 번째 시즌이던 1988년 2위(62승 1무 45패)를 차지한 데 이어 이듬해엔 곧바로 정규시즌 1위(71승 3무 46패)를 차지한 빙그레 이글스. 포스트시즌 때는 늘 해태 타이거즈에 밀리긴 했지만 정규 시즌에서 빙그레를 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2년 정민철이 빙그레에 입단한다.


1992년은 빙그레 장종훈이 홈런 41개를 쏘아 올린 시즌으로 많은 야구팬들이 기억하는 해다. 홈런왕과 타점왕을 동시에 차지한 장종훈의 맹활약 속에 빙그레 역시 역다 최다승 기록인 81승(2무 43패)을 거두며 정규시즌 1위에 올랐다.


정민철도 14승 4패, 방어율 2.48을 기록하며 강력한 신인왕 후보로 떠오른다.



하지만 빙그레는 한국시리즈에서 롯데에 1승 4패로 무릎 꿇고 말았다. 천적 해태가 플레이오프에서 탈락(2승 3패)한 이후라 아쉬움은 더욱 컸다.


정민철은 한국 시리즈 2차전에서 호투를 선보였지만 승리를 챙기지 못했고, 4차전에서는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다. 4차전 승리 투수는 신인왕 라이벌 염종석이었다.


결국 팀 우승과 함께 신인왕 역시 염종석이 차지하며 1992 시즌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때 그 누가 알았을까? 이글스가 다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할 줄 말이다. 1994 시즌을 앞두고 빙그레 이글스는 한화 이글스로 CI를 변경했고, 1998 시즌 7위로 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팀 성적은 나빠져만 갔다.


41홈런을 때린 이후 장종훈의 위압감은 해가 갈수록 줄고 있었다. 송진우 역시 당시엔 한 물 간 투수라는 평을 들었다. 투타의 핵이 늙어간다는 건 팀으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글스 팬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정민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정민철은 빙그레의 영광을 되새기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러나 페넌트 레이스는 에이스 투수 혼자 버티기엔 벅찰 만큼 길었다. 덕분에 정민철은 탈삼진왕을 차지하고도 10패, 11패를 받아들여야 했다.


정민철이 11패를 기록했던 1997 시즌 그의 방어율은 2.46이었으며, 10패를 기록했던 1994 시즌에는 2.15로 방어율 1위였다. 정민철은 4번이나 200이닝 이상을 책임졌지만 모두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기회가 다시 찾아온 건 1999년이었다. 정민철은 데뷔 이후 가장 나쁜 3.75의 방어율에 만족해야 했지만 타자들은 그에게 18승이나 챙겨줬다. 한화는 73승 2무 58패를 거두며 매직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 파트너는 76승을 거둔 두산. 승수는 물론 상대 전적에서도 8승 10패로 뒤진 상대였다. 하지만 승부는 싱겁게도 4차전에서 갈렸고 한화는 롯데, 삼성간의 혈전이 끝나기를 여유롭게 기다렸다.


이해 롯데와 삼성간의 플레이오프는 호세의 방망이 투척 사건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격렬하고 치열한 승부였다. 


차전부터 연장 12회까지 가는 대접전이었고, 5차전 역시 호세의 끝내기 홈런으로 승부가 갈렸다. 11회까지 갔던 7차전은 경기 시간도 경기 시간이지만, 중간에 경기 중간 사태까지 벌어지는 등 말 그대로 혈전이었다.


롯데의 근성은 공포스러울 정도였지만, 역시 체력이 문제였다. 흔히 단기전은 정신력과 집중력 싸움이라고 한다. 하지만 완전 탈진 상태에서 정신력만으로 버틴다는 건 망상에 가깝다.


결국 체력적 우위를 점한 한화가 4승 1패를 기록하며 한국 시리즈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1992 시즌 이후 한화 팬들이 무려 7년이나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그 누구보다 팀에 헌신했던 정민철은 드디어 혼자만 품고 있던 열망을 사람들에게 털어 놓는다. 바로 일본행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정민철은 일본에서 아픈 기억만을 남긴 채 돌아와야 했다.


3승 2패, 방어율 4.70이 그가 일본에서 남긴 성적의 전부다. 리그 수준 차이를 감안해도 데뷔 이후 8년간 평균 14승에 방어율 2.80을 기록했던 선수의 성적이라고 믿기는 힘든 기록이었다.


일본 데뷔전에서 7이닝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던 정민철이기에 더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요미우리의 텃세는 정민철을 고립시켰고, 팔꿈치 통증 역시 다시 정민철을 찾아왔다.


정민철은 조용히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국내 무대에서도 예전의 정민철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일본에서 돌아온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정민철은 평균 116이닝에 66개의 삼진밖에 잡아내지 못했다. 일본에 가기 전 8시즌 동안은 평균 188이닝을 던져 150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던 그였다.


그렇게 정민철은 사라지는 듯 보였다. 입단 동기생 염종석이 이미 오래 전 불꽃을 잃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팀 선배 원조 '빙그레 에이스' 송진우는 이미 부활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송진우는 힘을 빼는 피칭이 무엇인지를 터득하며 부활에 성공했다. 아니, 부활이라기보다 차라리 진화에 가까웠다.


그리고 정민철 역시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이제 정민철에게 불꽃같은 강속구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뛰어난 완급조절과 빼어난 제구는 상대 타자들을 요리하기 충분한 무기다.


이번 시즌 정민철은 9이닝당 탈삼진 3.5개를 기록하고 있다. 데뷔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하지만 투구수를 줄이는 데 있어서는 혁혁한 효과를 보고 있다. 그것이 정민철의 진화를 이끌어 낸 가장 좋은 변화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 지난해까지 정밀철은 경기당 평균 5이닝을 던지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올해는 평균 6이닝을 소화하며 불펜 부담을 줄여주고 있다. 방어율 2.70 역시 국내 복귀 이후 가장 좋은 기록이다.


이런 정민철에게 프로 통산 두 번째 20완봉과 최연소 150승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기록은 어쩌면 훈장보다 상처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대기록은 당연히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분명 등번호 55번을 달고 마운드에 오른 애송이 투수에게 우리가 기대했던 것은 그 이상이었다. 선동열이 직접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투수라면 확실히 이 정도는 성에 차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빙그레'의 에이스로 살아야만 했던 시절을 떠올려 보면 굉장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1993년 정민철은 방위병으로 근무하면서도 13승을 거뒀다. 홈경기에 단 18경기 나선 게 출전 기록 전부였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단지 다승왕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늘 과소평가 되는 선수가 바로 정민철이다. 신인왕 향방을 가른 것도 '90년대 최고 투수의 이름에서 정민철을 제외하게 만드는 것도 모두 부족한 승수 때문이다.


또한 그는 늘 구대성과 송진우가 주는 무게감에 짓눌려 살아야했다. 언론의 관심 역시 정민철보다는 이 두 선수 쪽이었다. 때문에 정민철은 늘 2인자 아닌 2인자로 살아야 했다.


정민철은 2005년 익숙한 55번을 버리고 23번을 새로운 등번호로 선택했다.


55의 절반도 되지 않는 23. 어쩌면 정민철은 자신에게 남은 에너지가 데뷔 때의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정민철은 자신이 혼자 팀을 책임져야 했던 과거의 부담감을 덜고 싶어 23번을 달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현재 '한화의 에이스'는 류현진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원조 '빙그레 에이스'는 송진우였다. 구대성이라면 선발도 선발이지만 역시 마무리 투수로 많은 팬들에게 각인돼 있다.


그럼 정민철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어쩌면 아직 이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기엔 이른 일인지도 모르겠다. 정민철의 '진화'는 그가 150승을 넘어 또 다른 역사를 써줄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그를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민철은 한화의 에이스였고, 그래서 빙그레의 에이스였다. 모교 역시 대전고다. 대전의 에이스 정민철, 그의 전설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계속해서 씌어지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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