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0. 내 인생의 첫번째 선발 투수

처음으로 야구장에 갔던 날, 선발 투수가 누구였는지 기억나십니까?

제 경우 깡마르고, 키가 엄청나게 큰 투수였습니다. 그리고 안경 낀 투수의 이미지는 최동원의 도도함이었던 제게 그 선수는 어딘지 어눌해 보이는 외모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리고 너무도 정통적인 언더핸드 딜리버리, 하늘 높이 테이크백을 했다가 큰 호(弧)를 그리며 무릎 높이에서 릴리스, 여기에 주저앉을 듯한 뒷축. 얼핏 볼링폼을 연상시키는 동작이었습니다. 그렇게 너무도 빈약해 부러질 듯 보였던 그를 처음 보고 경기에서 아무 기대도 안 했던 게 사실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만루홈런을 맞으며 무너졌고 결국 경기도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선발 투수의 이름은 제 마음속에 또렷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자랑스러운 그 이름은 박정현, 바로 '89년도 프로야구 신인왕입니다.




이 박정현이 아닙니다. -_-;




바로 이 박정현입니다!


'89년은 어릴 적 제 인생에 있어 가장 감격스러운 한 해였습니다. 늘 강(强)보다는 약(弱)에 가 가까웠던 저의 첫사랑 태평양 돌핀스가 최초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팀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던 2년차 투수 박정현 선수가 프랜차이즈 사상 최초로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우리도 할 수 있구나. 하면 되는구나.'

2년차라고는 하지만, 신인이던 '88 시즌 그는 6경기에서 18.6이닝밖에 던지지 않았습니다. 방어율은 7.71, 이 정도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정도의 성적이었던 게 사실입니다. 사실 그는 모교 유신고를 '87 황금사자기 준결승까지 올려놓으며 전국 무대에 이름을 알린 바 있었습니다. 덕분에 영남대와의 스카우트 파동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입단 당시 그의 손에 쥐어진 돈은 고작 600만원. 어쩌면 기대치가 딱 그만큼이었던 걸까요? '88 올림픽 대표 차출 문제로 대어급 신인 선수들의 입단이 미뤄졌던 그 해에도 그는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채 프로 첫 시즌을 마감하게 됩니다.



1. 김성근을 만나다.

하지만 원석은 그 가치를 알아주는 이에 의해 드디어 빛을 발하는 법, 그는 새로운 스승을 만나면서 야구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스승은 다름 아닌 투수 조련의 神 김성근 감독. '88년 9월 태평양 돌핀스의 감독으로 취임하신 김 감독님은 패배의식에 가득 차 있던 선수들의 승부 근성을 이끌어 내고자 그 유명한 '오대산 지옥훈련'을 실시합니다.




감독님은 야구 아세요? 전 야구 몰라요,




네, 이번에 MBC-Espn 중계진에 합류하신 그분입니다.


이렇듯 극기 훈련을 통해 선수들의 정신 자세를 다잡은 것 이외에도 김 감독님은 코칭 스탭 개편을 통해 기술적으로도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게 됩니다. 이때 OB 시절 함께했던 코치들이 대거 영입되게 되는데, 그 가운데에는 자신이 특급 언더핸드 투수였고 또 그래서 언더핸드 투수를 잘 키워내는 신용균 코치도 포함 돼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싱커를 잘 가르치기로 소문난 분이었습니다. 김성근과 신용균, 박정현이 새로운 투수로 거듭나는 데 있어 이보다 좋은 코칭 스탭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두 분 밑에서 죽어라 '구른' '89년 동계 훈련, 박정현은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번 야구팬들에게 각인시키게 됩니다.

'89년 박정현 선수의 최종 성적은 19승 10패 2세이브, 방어율 2.15, 총 38경기에 등판 무려 242.6이닝을 던지며 거둔 기록이었습니다. 선발로 나선 25경기에서 완투 17회(68%), 그 가운데 네 번은 완봉이었습니다. 이 시즌에 50을 기록한 그의 RSAA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한 선수는 오직 선동열(52)뿐이었습니다. 한 시즌 전만 해도 방어율 7.71을 기록했던 선수가 선동열과 견줄 만한 투수로 성장했던 것입니다. 이제 그 볼품없던 투수가 제게도 확실히 에이스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태평양 팬들 역시 에이스의 등장에 환호했고, 정명원 ․ 최창호 등 두 명의 동료 투수와 함께 신인 트로이카를 이루며 팀의 성적 또한 대약진, '89 태평양은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게 됩니다. 이 셋은 방어율 부분 2~4위를 차지했고, 40승을 합작하면서 팀 전체 62승 가운데 61.5%를 책임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팀의 첫 번째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고졸 2년차 에이스는 진정한 자신의 진가가 무엇인지 전국의 야구팬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주게 됩니다.



2. 내 인생의 첫번째 에이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인천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 첫 경기에서 팀의 선발로 나서게 됩니다. 박정현 선수가 마운드 위를 오래지켜줄 것이라는 건 모든 태평양 팬들의 바람이었겠습니다만, 아마 아무도 그가 그렇게 오래 마운드를 지켜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려 14회 완투, 피안타는 8개였고 사사구는 3개였습니다. 14회말에 김동기 선수가 끝내기 홈런을 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15회에도 마운드에 올랐을지 모를 일입니다.

당시 삼성의 선발 투수는 성준 선수였습니다. 성준 선수 또한 무려 9.1이닝을 투구했습니다. 다른 이도 아닌 성준이 마운드에 있었음에도, 게다가 14회까지 경기가 치러졌음에도 총 경기 시간은 2시간 56분. 박정현이 에이스로서의 위용을 얼마나 멋지게 보여줬는지를 나타내주는 자료라고 하겠습니다. 삼성 팬들에겐 박충식 선수가 로망이듯, 그렇게 태평양 팬들에게 있어서도 '89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의 박정현은 영웅 그 자체였습니다.

대구에서 벌어진 2차전은 삼성이 차지하며 시리즈 전적 1승 1패. 태평양은 1차전 박정현, 2차전 최창호에 이어 트로이카의 마지막 일원 정명원을 선발로 내세웁니다. 삼성의 선발은 역시 2차전 선발이었던 최동원 -_-; (뭐, 그때 야구가 이랬죠 ^^;) 그러나 두 선발 투수는 마운드를 그리 오래 지키지 못했습니다. 약속이라도 한 듯 1실점밖에 하지 않았음에도 모두 마운드를 후속 투수들에게 넘기게 됩니다. 물러날 곳이 없는 단기 시리즈의 최종전. 결국 모든 짐은 두 에이스의 어깨에 짊어질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

결국 4회부터 박정현, 성준이 각각 양 팀의 마운드를 이어받으며 1차전의 리턴 매치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8회까지 이어진 0의 행진, 9회에도 박정현은 마운드에 올라 아웃 카운트 두 개를 잡아 냅니다. 그때 갑자기 술렁이는 팬들의 목소리, 절뚝거리며 걸어 내려오는 젊은 에이스. 총 5.2 이닝을 던지고 바통을 양상문에게 넘깁니다. 피안타는 겨우 2개. 양상문이 이닝을 마무리지으며 경기는 9회말로 접어 들게 되고, 삼성 프런트도 성준을 내리고 김성길을 마운드에 올립니다.




드디어, 해태다!

결국 경기는 연장으로 이어지고 김일권의 중전 안타, 폭투에 이은 3루 쇄도. 그리고 삼성의 만루 작전. 하지만 결국 유명선이 희생양이 되며 터진 곽권희의 끝내기 안타. 3시간 49분의 혈투 끝에 태평양 돌핀스가 '89 준플레이오프에서 승리를 거두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됩니다. 그러나 승리의 희열을 만끽하던 순간, 타자 무릎에서 떨어지는 싱커를 뿌려대던 우리의 에이스의 모습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해태와의 플레이오프 내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이스를 내세울 수 없게 된 팀 역시 쓸쓸하게 3연패, 연투의 후유증이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3. 잊혀지는 그 이름

이후 '92년까지 4년 연속 10승 투수로 이름을 드높였지만, 그의 방어율은 갈수록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89년에 173이나 되던 ERA+는 147, 114, 117, 82, 48로 하향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93년은 1군 경기에 단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한 채 부활에만 매진해야했고 '94년에도 별반 뛰어난 성적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태평양이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경기를 치렀던 '95 시즌, 그는 데뷔 첫해와 마찬가지인 7.71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쓸쓸히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져 버리고 맙니다.




초지일관?

현대로 팀이 간판을 바꾼 이후에도 그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96~‘97 그는 두 시즌에 걸쳐 RSAA -12만을 기록하는 데 만족해야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팀이 사상 첫 번째 우승을 노리던 '98년 트레이드 마감일, 그는 가내영 ․ 현금 6억과 함께 쌍방울로 트레이드 됩니다. 조규제를 얻어오기 위한 트레이드였습니다. 다시 김성근 감독 밑에서 뛰게 된 박정현 선수는 9경기에서 24.1이닝을 던지며 방어율 2.22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이미 사람들의 관심은 박정현이 아닌 조규제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결국 한국시리즈 3차전에 선발로 나섰던 조규제는 김동수에게 솔로 홈런을 얻어 맞으며 패전의 멍에를 쓰고야 말았습니다. 하지만 인천에서 벌어진 6차전, 9회 2사에 유지현 선수의 타구가 중견수 이숭용 선수의 글러브 속으로 빠져 들어가며 도원 구장은 울음바다가 돼 버립니다. 선수도 울고, 관중도 울고, 구장도 울었습니다. 17년간 쌓였던 한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팀이 '89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이후 9년만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팬들조차 그 당시 에이스였던 박정현의 이름은 모두들 잊은 지 오래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박정현은 울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현을 위해 우는 이가 있었습니다. '같이 고생한 (박)정현이가 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해 너무 아쉬워요.' 울먹이느라 제대로 말을 잇지는 못했지만, 그는 분명히 또렷한 전라도 억양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가 자란 전라도 땅에서 뛰고 있는 박정현을 떠올리며 우리의 에이스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박정현이 생각났다는 듯 그의 이름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그 큰 키에 어울리지 않는 언더핸드 동작으로 자기들을 울고 울리던 에이스의 이름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래, 박정현이 없구나. 그래, 최창호도 없구나. 이제 그들이 없구나. 전국의 티비 앞에서, 몇몇 태영양 팬들이 박정현을 위해, 이제는 적이 돼 버린 최창호를 위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4. 잊혀진 투수, 마운드를 떠나다.

그렇게 자신을 위해 울어준 친구의 고마운 마음씀씀이에 힘을 얻었는지, 박정현은 '99 시즌 124 이닝 동안 3.92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재활의 몸부림을 칩니다. 이 시즌에 아쉬웠던 건 초반 4연승을 내달리던 중 현대와의 경기에서 대량실점하며 상승세가 꺾여 버렸다는 점입니다. 친정 팀 현대가 결국 그의 재기를 막은 셈이 됐습니다. 어쩌면 이때가 그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신문지상에 오르락 내리락 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시 팀의 간판이 쌍방울에서 SK로 변하게 되고 '00 시즌 56이닝 5.75의 방어율을 마지막으로 그는 프로무대를 떠나게 됩니다. 한때 자신이 주인이었던 도원 구장에서 그렇게 그는 자신의 마지막도 장식합니다. 통산 253경기에 나와 1091이닝, 방어율 3.45. RSAA 83을 기록하며 65승 54패 21세이브. 어떻게 보면 정말 대단할 것 없는 기록을 남긴 채 그는 31살이란 젊은 나이로 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어땠을까요? 어깨가 싱싱한 고졸 투수는 더 많이 보호해줘야 한다고 그때도 사람들이 생각했더라면? 아니, 태평양처럼 선발, 중간, 마무리 가리지 않고 등판하지 않아도 될 강팀에서 뛰게 됐다면? 아니, 아니, '89년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그렇게 바보처럼 자원 등판하지만 않았더라면? 그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정명원 선수가 울먹이지만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게 가장 솔직한 말인지도 모르겠어요. 정말 미안했어요. 하필 이런 팀의 에이스 자리를 맡겨야 해서. 그래서 정말이지 너무 너무 고마웠어요. 하필 이런 팀의 에이스가 돼 주어서. 정말 고마웠어요. 안녕, 에이스. 안녕, 신인왕. 안녕, 안녕, 내 기억 속의 첫 번째 선발투수. 안녕, 박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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