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길버톨로지(Gilbertology). 어느덧 슈퍼스타로 성장한 길버트 아레나스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신조어다.


아레나스는 이번 시즌 현재까지 PER 24.52를 기록하며 생애 최고 시즌을 보내고 있다. 소속팀 워싱턴 위저즈 또한 28승 19패(승률 .596)로 빼어난 성적을 올리고 있다. 동부 컨퍼런스에서 위저즈보다 좋은 승률을 기록하고 있는 팀은 오직 디트로이트 피스톤스(29-18, 승률 .617)뿐이다.



하지만 슈퍼스타 혼자 팀을 100% 이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슈퍼스타와 보조를 맞출 조력자의 존재는 강팀 필수요소다. 피펜은 조던 없이 챔피언 반지를 단 한 개도 얻지 못했지만, 그것은 조던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모든 현재 스포트라이트가 아레나스에게 맞춰져 있는 게 사실이지만, 캐론 버틀러(PER 19.99)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버틀러는 지난 5일 시애틀전에서 생애 최다인 38점을 쏟아 부으며 팀의 118-110 승리를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시즌 평균 득점(20.9점), 리바운드(7.9개), 어시스트(3.9개) 모두 커리어 최고 기록이다. 덕분에 생애 첫 올스타에 선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바야흐로 버틀러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그가 NBA 무대를 밟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저 길거리를 떠도는 말썽꾸러기 '양아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인 장래 희망 역시 NBA 선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버틀러 스스로도 어른이 되면 포주나 마약상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 15살이 되기도 전에 이미 15번이나 경찰에 체포된 전과를 가진 소년이라면 당연한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이른 나이에 이미 모든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버틀러에게 농구가 희망의 빛줄기로 다가온 건 한 갱생(更生) 시설에 머물 때였다. 만 14세였던 버틀러는 총기 및 코카인 소지 혐의로 14개월형을 선도 받았다.


그가 형기를 채워야 했던 곳은 위스콘신주 웨일스에 있는 에단 앨런(Ethan Allen) 학교. 그곳에서도 버틀러는 교화되지 못했고, 결국 2주간 독방 신세를 져야 했다.


그때 버틀러에게 가장 소중하게 다가온 존재는 다름 아닌 어머니. 버틀러는 독방에서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를 쓰고 또 썼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사회에 다시 나가게 되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진지하게 반성하는 편지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훌륭한 농구 선수가 되길 바랐고, 버틀러 역시 어머니를 다시 한 번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결국 버틀러는 농구 장학생으로 코네티컷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 시절 버틀러는 스몰 포워드에서 슈팅 가드로 포지션을 변경하게 된다. 체중 감량과 외곽슛 능력 향상을 통해 좀더 자기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변화를 꾀한 것이다.


NCAA에서 보낸 2년 동안 평균 18득점은 아주 높은 편이 아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뛰어난 스틸 능력(2.1개) 그리고 가드로서는 나쁘지 않은 리바운드 기록(7.6개)은 확실히 인상적인 수치였다. 평균 어시스트 3개도 그가 주전 포인트 가드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결국 버틀러는 2002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10번으로 마이애미에 지명되며 프로 무대에 서게 됐다. 포주나 마약상을 동경하던 문제아가 당당한 NBA 선수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버틀러의 욕심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전체 10번 버틀러는 다짐했다. 커리어나 끝나는 순간까지 자신을 건너 뛴 9개 팀을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말이다.


버틀러의 NBA 생활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첫 시즌에는 평균 15점을 올리며 NBA 올 루키 팀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2년차 때는 부상으로 68경기밖에 나서지 못했고, 평균 득점 역시 9점으로 떨어졌다.


팀에는 버틀러와 비슷한 유형인 드웨인 웨이드가 신예 스타로 자리매김한 후였고, 결국 마이애미는 샤킬 오닐을 얻기 위해 라마 오돔, 브라이언 그라이언트와 함께 그를 LA 레이커스로 트레이드 했다.


웨이드와 활동 영역이 겹치는 선수가 코비 브라이언트가 버티고 있는 팀으로 옮긴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결국 2005년 7월 14일, 버틀러는 또 한 번 트레이드 명단에 포함되게 된다. 레이커스가 콰미 브라운을 얻어오는 대가로 그를 위저즈로 트레이드 시킨 것이다. 이미 오프라 윈프리 쇼에도 출연하는 등 버틀러 나름대로 LA에서 입지를 굳힌 상태라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한 트레이드였다.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트레이드에 아쉬움을 표시했다. 코비 브라이언트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사실 버틀러는 LA로 트레이드 되자마자 브라이언트와 친분 관계를 맺는 것으로 클럽하우스 생활을 시도했다. 둘은 여름내 헬스클럽에서 함께 운동했고, 각종 세션에서 나란히 자리잡은 둘의 모습을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버틀러는 코비 브라이언트 집에도 거리낌없이 드나들게 됐다. 소문난 외톨이 브라이언트와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된 것이다.


이런 버틀러의 사교성은 브라이언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버틀러는 마이애미 시절 팀 동료였던 웨이드와 여전히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다. 팀 동료 아레나스까지 포함하면, 현재 NBA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슈팅 가드 세 명과 모두 돈독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버틀러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어두운 과거가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모티브가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한 바 있다. 어차피 뒤에서 자신의 과거를 수근댈 것을 알기에 오히려 당당히 과거를 밝히고 자신이 먼저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얘기다. 어두웠던 지난 일에 얽매이는 대신 밝은 미래를 찾아 나선 진취적인 제스쳐였다.


이런 마인드가 바로 오늘날의 버틀러를 만들었다. 단지 롤 플레이어가 아닌 위저즈 빅 3의 당당한 한 축 버틀러 말이다. 아레나스와 함께 뛰면서도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실 이미 버틀러는 자신을 건너 뛴 9팀 가운데 몇 팀쯤 후회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농구 선수로서 버틀러는 아직 완성형이 아니다. 외곽슛 능력은 좋은 편이지만 3점 슛 능력은 여전히 물음표를 떼지 못했다. 3번으로서는 좋은 편이지만 2번 자리에서 수비 능력 역시 좋은 평가를 주기가 어렵다.


그러나 오히려 그 어두운 과거가 버틀러는 한 단계 더 성숙할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 과거의 무절제를 극복하고 자신을 다스리는 미덕을 버틀러는 너무도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 유명한 브라이언트와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 팀원이라면, 아니 아레나스의 정신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팀원이라면 분명 그는 아주 믿음직한 사내일 것이다.


버틀러가 앞으로 몇 팀이나 더 후회하게 할지, 그의 커리어가 끝나는 순간까지 우리 버틀러를 믿기로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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