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에 해태가, 여자 배구에 호남정유가 있었다면, 농구엔 기아자동차가 있었다. 연승, 절대강자, 독주, 그리고 연패(連覇). 왕조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던 최고 엘리트 팀. 우리 스포츠가 낳은 최고 걸작들.

그들의 승부는 처음부터 타자(他者)와 연루돼 있지 않았다. 그들의 패배는 상대에 의한 게 아니었다. 질 수 없다는 간절함이 아닌 이길 수밖에 없다는 의무와 그들은 맞서 싸워야 했다. 그렇게 오히려 그들의 승부는 스스로의 내면을 향해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그들의 승리는 위태로웠다.

KIA가, GS칼텍스가, 모비스가 선조들 영광을 아직 재현하지 못한 건 어쩌면 그래서 당연한 귀결이다. 아니, 어쩌면 그날의 영광은 다시 이 후예들에게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의무에 맞선 싸움은 절박했고, 안타까웠으며, 때문에 이들은 압도적일 만큼 강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제 기아자동차의 마지막 후계자가 떠난다. 사마귀 슈터, 김영만.


센터 출신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슛 터치와 특유의 페이드 어웨이. 덧붙여 상대 에이스를 침묵하게 만드는 질식 수비까지. 비단 그가 중앙대를 졸업했기 때문에 기아자동차의 적자(嫡子)로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김영만이야 말로 그 누구보다 '최고' 지위에 가까운 선수였다.

김영만 입단 이후 김유택이 들어가 있던 '허동택' 트리오는 자연스레 그의 이름을 따 '허동만' 트리오로 새롭게 태어났다. 프로농구가 출범한 뒤에도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순항은 멈출 줄 몰랐다. 다소 노쇠한 허재와 강동희의 뒤를 확실히 받쳐줄 새로운 터빈 엔진, 김영만의 힘이었다.

이들은 당연하다는 듯 프로 출범 이후 꼭 석 달 만에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연세대의 젊은 힘에 잠시 눌렸던 농구대잔치 최강팀 기아자동차가 프로 최강 팀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렇게 기아 왕조의 새로운 서막이 올랐고, 다시금 기아는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누릴 것처럼 보였다.

'97~'98 시즌 김영만의 맹활약은 계속됐다. 챔피언결정전에서 눈물겨운 투혼을 선보인 허재가 이 시즌 최고 주인공이었지만, 김영만은 베스트 5와 수비 5걸에 모두 뽑히며 자기 입지를 더욱 확고히 다졌다. 다음 시즌에도 베스트 5, 한 해를 건너 뛴 '00~'01 시즌에는 다시 수비 5걸. 김영만은 확실히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 살아있음이 김영만에게는 오히려 위태로웠다. 허재는 이미 팀을 떠났고, 기아는 왕조 지위를 잃은 지 오래였다. 결국 강동희마저 떠났다. 김영만 역시 트레이드라는 된서리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부상에도 계속 출전을 강요받은 후유증을 잔뜩 짊어진 채 말이다. 기아의 '마지막 황제' 김영만은 그렇게 무릎을 절룩이며 왕조의 후계자 자리를 내놓았다.

기아를 떠난 이후 김영만의 삶 역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왕조의 몰락을 외로이 막아야만 했던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였다. LG에서 다시 강동희와 조우했지만 강동희의 칼날은 내구력이 떨어진 상태였고, 김영만의 그것은 무뎌진 후였다. 세월마저 그의 발등에 내려앉기 시작했고 김영만은 조용히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시 LG를 떠나 동부로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거기에도 김영만의 자리는 없었다. 코치 강동희는 플로어 위에서 김영만에게 아무 도움이 될 수 없었고, 그건 선수 시절의 마지막 감독 허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김영만은 은퇴를 선택했다.

아마도 의도된 아이러니겠지만, 그의 은퇴 경기 상대는 동부다. 허재, 강동희, 김영만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영광스런 퇴장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시에 기아자동차 팬들 역시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받는다. 이미 몰락한 왕조의 깊은 침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김영만의 은퇴가 허재, 강동희 때와 또다른 건 분명 이 때문일 터다.

한때 승부의 바다 위를 주름 잡았던 기아 엔터프라이즈 호(號)는 깊고 깊은 바다 속에서 이제 정말 영면을 취하게 됐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숨쉬고 기뻐하며 생기로 충만했던 시간들 혹은 이들의 패배를 간절히 기도했던 시간들은 아마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남을 것이다. 스포츠와 함께 나이 들어 가는 한 방식으로서, 그리고 김영만이 지도자로서 내딛는 새로운 첫발에 대한 진심어린 축하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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