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분식회계(粉飾會計)라는 낱말이 있다. 본래는 기업이 자산이나 이익을 실제보다 부풀려 재무제표상의 수치를 고의적으로 왜곡시키는 일을 가리키는 경제학 용어다. 하지만 야구팬들은 이 말을 다른 뜻으로 사용하고는 한다. 야구팬들이 말하는 분식회계는 앞선 투수가 남겨 놓은 주자에게는 실점을 허용했지만, 자기 자신의 방어율에는 영향이 없는 경우를 일컫는 표현이다.

이런 농담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방어율이 구원투수의 능력을 올바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방어율 계산의 핵심은 자책점과 이닝수다. 자책점이 없으면 방어율은 올라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자가 루상에 나가 있는 상황에서 감독이 구원 투수를 마운드에 올리는 이유는 지금 상황에서 더 이상 실점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실점을 허용한 투수는 팀에 손해를 입힌 셈이 된다. 하지만 그의 방어율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대신 주자를 남긴 투수에게 고스란히 자책점이 돌아가게 된다.

그럼 이런 방어율의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방법은 간단하다. 앞선 투수가 남겨 놓은 주자(승계주자) 대비 실점율을 알아보면 구원 투수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해주었는지 판가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흔히 승계주자실점율이라고 부른다. 한번 각팀 투수들의 승계주자 실점율부터 보도록 하자.


기아 불펜이 소문 그대로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비율과 누적 횟수 모두에서 가장 적은 수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구원 투수가 가장 효율적으로 승계주자의 득점을 억제하는 방법은 삼진이다. 기아는 이 상황에서 19.2%의 상대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리그 3위로 괜찮은 수준이다. 하지만 25.0%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현대는 두 번째로 많은 실점을 허용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


정답은 바로 수비다. 기아는 이 상황에서 DER .754를 기록했다. 상대 타자들이 투구를 때려봤자 75.4%가 아웃으로 귀결됐다는 뜻이다. 반면 현대는 60.2%에 그쳤다. 가장 높은 비율의 실점율을 기록한 두산은 57.7%밖에 안 되는 기록이다. 물론 수비는 수비들의 역량만은 아니다. 투수들이 수비 가능한 타구를 허용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기아의 투수와 수비진 모두 실점 위기 상황에서 집중력을 발휘했다고 봐도 크게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 자신의 자책점 역시 구원 투수진이 내준 점수다. 불펜의 질(質)을 따지자면 이 점 역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승계 주자 실점과 자신의 자책점을 합산해서 한번 불펜의 조정 방어율을 구해보자는 것이었다. 다음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여전히 기아가 1위다. 그리고 현대는 7.10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로 최하위를 차지했다. 게다가 현대는 원래 구원진의 방어율과 조정 방어율의 차이 역시 8개 구단 가운데 가장 크다. 원래도 방어율이 가장 나쁠뿐더러 분식회계(?) 역시 심각하다는 뜻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현대 구원 투수진은 이 상황에서 전체 타자의 25.0%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K/9로 환산했을 때 10.31의 굉장한 기록이다. 하지만 BB/9 역시 5.15나 된다. 홈런 역시 네 개(HR/9 0.98)나 얻어맞았다. 투수들이 수비진을 믿지 못해 너무 자기 고집을 피운 결과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긁히는 날은 성공했지만 그렇지 못한 날엔 너무 많이 얻어맞은 것이다.


특히 현대는 필승 계투조라 할 수 있는 이현승-황두성-신철인 모두 높은 실점율을 보이고 있어 더더욱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나마 박준수가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코칭 스탭에게는 다행스런 일이겠지만 7회부터 박준수를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래저래 답답한 현대 불펜이다.

지난 해 삼성이 한국 시리즈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은 권오준-오승환으로 이어지는 KO 펀치였다. 올해도 그 영향력은 계속되고 있다. 두산 역시 이재우-정재훈 라인이 위력을 발하면 한국 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었다. 장마가 끝나고 무더운 여름이 찾아오면 불펜 투수의 역할은 더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과연 올해는 어떤 '믿을맨'들이 팀의 중심을 잡아줄지 '06시즌 버전 권오준, 이재우를 기대해 본다. 불쇼는 상대팀 팬들만 즐겁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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