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청룡에 1983년 프로야구 후반기 우승컵을 안긴 삼총사. 왼쪽부터 이종도(62), 이해창(63), 김재박(62·왼쪽부터). 록 밴드 '타카피'는 'MBC 청룡'에서 이종도는 정말 잘 치고, 김재박은 정말 빠르다고 노래했다. 이해창 역시 '쌕썍이'라는 별명처럼 빠른 발을 앞세워 김재박과 함께 테이블 세터(야구에서 1, 2번 타자를 함께 이르는 말)를 꾸리는 일이 많았다.   


타카피가 부른 'MBC청룡'은 "MBC 청룡은 어디로? 우승 한번 못하고 어디로 사라졌는가?"하고 묻는 가사로 시작합니다. 이 노랫말처럼 프로야구 원년 멤버였던 MBC는 우승 한번 못하고 1990년 팀 이름을 LG로 바꾸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MBC가 해태(현 KIA)를 꺾었다면 이 노랫말도, 프로야구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당시 한국시리즈는 전·후기리그 우승팀이 맞붙는 방식이었습니다. MBC는 후기리그를 1위로 마쳤지만 전기리그 챔피언 해태에 1무 4패로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한국시리즈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운 해태는 이후 1986~1989년 4연패를 차지하는 강팀이 됐지만 MBC는 우승은커녕 한국시리즈에도 한 번 나가지 못하는 만년 중하위권 팀이 되고 말았습니다. 1989년까지 MBC가 프로야구에 참가한 8년 동안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한 게 최고 성적이었습니다. 당연히 두 팀 사이에는 딱히 라이벌 구도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MBC가 LG가 팀 이름을 바꾼 1990년 여름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LG는 그해 8월 25일까지 53승 42(승률 .558)패로 3위, 해태는 47승 3무 41패(.533)로 4위였습니다. 두 팀은 서울 잠실구장에서 이날까지 주말 3연전 경기 중 두 경기를 치러 1승 1패를 주고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8월 26일 경기에서 사건이 터집니다.


해태는 신동수(50), MBC는 김용수(56)를 선발로 내세운 이날 경기는 6회초까지 0-0 무승부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LG가 6회말 박흥식(54), 김재박, 이광은(61)의 세 타자 연속 안타 등을 묶어 3점을 뽑았습니다. 해태 김응용 감독(75)은 7회말에 김정수(54)에 이어 강태원(45), 최향남(45), 강대성(45)까지 투수 4명을 마운드에 올렸지만 7점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결국 8회초 해태가 공격을 시작하기 전 해태 관중이 그라운드로 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500명이 넘는 관중이 그라운드를 점거했습니다. 그라운드 안에서 술을 마시거나 광고판에 불을 지르는 건 기본. 마운드와 타석을 점령한 채 '이렇게 던지고 치란 말이야'하고 시위를 벌이는 관중도 있었습니다.


이대로 놔두었으면 그냥 '해태 팬 난동'으로 끝이 났을 텐데 LG 관중 한 명이 의자를 들고 내려와 해태 팬 머리를 내리쳤습니다(아래 사진). 결국 양쪽 관중이 모두 흥분하면서 그라운드 안팎에서 패싸움으로 번졌습니다. 해태 팬들은 그라운드 안에서 관중석을 향해, LG 팬들은 반대 방향으로 손에 잡히는 건 뭐든지 집어던지기 바빴습니다. 싸움에 낄 의도가 없던 팬들도 날아온 빈 병이나 깡통에 얻어맞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경찰은 3개 중대를 투입해 관중을 경기장 바깥으로 내몰았습니다. 심판진이 경기 재개를 선언했을 때는 1시간 7분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 환경미화원들은 양 팀 관중이 버린 쓰레기 총 40t을 치워야 했습니다. 


해태 김 감독은 이날 경기 후 "내 책임이 크다. 해태를 사랑하는 팬들을 위해 이겨야 하는데…. 다음 경기를 위해 승부가 기운 상황에서 2진급 투수를 내보내야 하는 어려움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2진급 투수는 강태원과 최향남을 가리키는 표현. 해태는 당시 리그 선두였던 빙그레와 주중 3연전을 치르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투수를 아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패싸움은 경기장 안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안응모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장관에서 '경기장 폭력사태 근절'을 지시했고, 잠실구장을 담당하는 서울 강남경찰서에서는 이날 현장에서 연행한 이들 중 19명을 대상으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및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다시 이들 중 11명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피 끓는 사건 이후 두 팀은 라이벌로 자리 잡게 됩니다. 역시 좀더 라이벌 의식을 느낀 건 이 경기에서 1-13으로 패한 해태였습니다. 해태는 결국 정규시즌을 2위로 마쳤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3전 전패를 당한 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거꾸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 LG는 여세를 몰아 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정상에도 올랐으니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었습니다.


1990년 LG에 입단했다가 트레이트를 통해 1994년 해태로 팀을 옮긴 이병훈 전 KBSN 해설위원은 "LG 시절엔 솔직히 해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재계 라이벌인 삼성이나 잠실 라이벌 OB(현 두산)에 포커스를 맞췄다. 그런데 해태에 가보니 'LG에는 지지 말자'라는 분위기가 확실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해태 혼자만 LG를 짝사랑(?)했던 건 건 아닙니다. 1994년 LG를 한국시리즈 정상으로 이끌었던 이광환 현 서울대 야구부 감독(66·사진)은 "그때도 지금처럼 LG는 인기가 대단한 팀이였다. 잠실에서 해태하고 맞붙으면 정말 힘든 경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지는 날에 팬 3000명 정도가 모여 '감독 나오라'고 외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감독으로서도 더 이기고 싶은 경기였다"고 회상했습니다.


이 라이벌 의식이 절정에 달했던 건 1997년 한국시리즈였습니다. 당시에는 서울 연고 팀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 1, 2, 5, 6, 7차전을 잠실구장에서 열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호남 팀 해태는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고도 안방 어드밴티지 없이 경기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래도 승자는 해태였습니다. 해태는 마운드에서는 이대진(42), 타석에서는 이종범(46)이 팀을 이끌면서 4승 1패로 LG를 물리쳤습니다. 


이후 2001년 팀 이름이 KIA로 바뀔 때까지 해태가 한국시리즈 정상을 차지한 적은 없습니다. 해태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도 마지막 우승도 모두 상대 팀이 전신 MBC와 LG였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해태 팬들 사이에서는 "잠실은 해태 안방 구장"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리기도 했습니다. '고향이 어디냐?'는 사교적 질문이 여전히 폭력적인 시절이었고 그에 대한 반작용이 그렇게 야구장에 떠돌았던 겁니다.


물론 LG라고 당하기만 했던 건 아닙니다. 2002년 정규리그 4위로 포스트시즌 막차를 탔던 LG는 플레이오프에서 3승 2패로 KIA를 물리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습니다. 그 뒤로 13년 동안 두 팀이 '가을야구'에서 맞붙은 적은 없었습니다. 두 팀이 맞붙는 올해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앞두고 다시 '피가 끓는다'고 말하는 팬들이 적지 않은 이유입니다. 물론 그 사이 야구장에서 아저씨 냄새는 사라졌지만 말입니다.


올해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LG가 승리를 거두면 두 팀은 가을야구에서 시리즈 전적 2승 2패로 균형을 맞추게 됩니다. 거꾸로 KIA가 업셋에 성공하면 3승 1패로 한 걸음 더 앞서가게 되고요. 과연 14년 만에 맞이하는 이 승부 끝에 웃는 팀은 어디가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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